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단 Dec 14. 2022

돌이켜보면 이유가 있다.

나의 여행은 어디서 왔나.

아빠와 만든 “시간의 점”


기억 속 아빠는 무서움과 자상함이 뒤범벅되어 있다.

주말 아침엔 종종 내복 차림으로 앉아 오빠와 놀다가도 아빠가 갑자기 “옷 입고 나와”라고 하면, 나가야 했다. (그 시절 아빠 특) 우리는 종종 행선지를 모른 채 따라나섰는데, 어떤 날은 영종도에서 텐트를 치고 자며 바다낚시를 했고, 밤이 되면 땅과 구분되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 자리한 저수지에 낚시를 가기도 했다. 위치가 기억나지 않지만 논 바닥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도 배웠다. 무궁화호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던 아빠의 본가 가는 길, 아빠는 늘 대전역 즈음 훌쩍 내려서 국수를 사 오곤 했다. 늘 바쁘셨던 부모님은 기차 예약을 미리 할 수 없었고, 늘 좌석은 하나뿐, 3명은 입석으로 오랜 시간을 가야 했다. 그릇을 번갈아 들고 호호 불며 한 자리에 둘러서서 먹는 가락국수는, 맛있었다.


집에서 본 아빠와 여행에서 본 아빠는 어린 나의 눈에도 달랐다. 한없이 무섭고 바쁜 아빠는 여행지에서는 늘 느긋하고, 농담을 곧잘 하셨다. 아빠는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어 보였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도 지도만 들고도 길을 잘 찾았고, 전국 어디서든 헤매는 일이 없었다.


아빠는 낚시를 좋아했고, 엄마의 마음도 모른 채 어딘가 자꾸만 떠났고, 유독 나와 어딘가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엄마와 오빠는 못마땅해했지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으셨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종종 가고픈 곳은 아빠와 함께 갔던 월정사다. 여러 명이 좁은 차를 타고 며칠 동안 여러 번 이동해야 했고 잠자리도 편치 않았는데, 그날 안아보았던 끝이 보이지 않게 높고 커다란 전나무도, 차갑게 물보라가 일던 바다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가 간지러웠다. 앨범 속에 간직한 지금 내 나이였을 아빠의 건강하고 젊은 시절, 그리고 지금 유의 나이 언저리였던 나. 아빠가 찍은 필름 카메라 속에는 온통 나뿐이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시간의 점”들이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 /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여행의 기술, 210면. 알랭 드 보통 (워즈워스의 글 재인용)



생각해보니 10대 중반 이후로는 아빠와/가 여행을 간 기억이 없다. 아빠는 오래 아프셨고, 여행이 뜸해진 건 아마도 그 무렵부터인 듯하다. 내가 20대 때 아빠는 가까운 거리도 걷기 힘들어하셨고, 대학 졸업식도 못 보시고 돌아가셨다. 여행을 좋아했던 아빠가 자식을 키우느라, 자신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하시고 싶은 걸 못할 때의 마음을 나는 이제야 돌이켜 본다.


이제는 옆에 계시지 않기에 아빠는 변명도, 나에게 달리 보일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장점(단점도)은 아빠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그걸 이해해주고 지지해준 엄마가 계셨으니 가능한 것을 알고 있다.) 지금의 나는 아빠와 만든 ”시간의 점“들을 딛고 살아간다.


나도 주고 싶은 것


나는 자랄수록 어딘가 훌쩍 떠나는 걸 좋아했고, 여전히 호시탐탐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때마다 엄마는 아빠를 닮았다고 했다. 돌이켜 보니 맞는 말이다. 자연으로 향하고 거기서 마음을 달래고 오는 법, 텐트를 치고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 법. 산을 오르고 내리는 법, 낚시찌를 끼우고 기다리는 법, 일단 떠나는 대담함… 여행자로 손색이 없는 이 기질들은 아빠가 물려준 유산이구나 싶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이 왜 그리도 좋았을까. 어렴풋이 느껴진다. 아주 어릴 때도 미지의 공간, 새로운 경험이 주는 두근거림도 있지만, 지금의 나의 일상과 자발적으로 단절한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억압들 위로 솟구”치는 상상.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중략)… 이런 이륙에는 심리적인 쾌감도 있다.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적인 변화를 상상하며,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한다.

_여행의 기술. 61면. 알랭 드 보통



나는 나의 삶과 거리두기를 위해 떠나고 싶었고, 사랑하는 내 삶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여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아빠 덕분에 어디든 잘 다녔다.


딸과 여행을 가려니, 아빠 생각이 많이 난다. 나도 주고 싶다. 때로는 겪어야만 배우는 것들이 있다. 여행을 삶 속에 넣어두고 위안으로 삼는 법, 돌아올 곳이 있음에 감사하는 것, 일상의 내가 누리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과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제 여행이 보름 정도 남았다. 튼튼한 가방과 신발을 준비할 때다. 이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언젠가 딸이 스스로/혼자 여행을 가겠다고 할 것이다. 어느 시점일지도, 떠나는 마음이 어떤 상태일지도 나는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좋았던 여행의 기억도 나와 다르게 떠올릴 것이다.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신과 거리두기를 하고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 내가 배운 것을 전해줄 뿐이다. 그것이 “시간의 점”이 되어 인생의 디딤돌이 되길 바라며.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아빠가 나에게 전해주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도 튼튼한 가방과 신발을 사서 쥐어줄 것이다. 잘 다녀오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순간을 기억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