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차_완전체의 시간 @ 부산-경주
쉬어가라고_비
어젯밤부터 새차게 내린 비는 그칠 기미가 없는 듯하다. 전국에 비가 내린다고 한다. 유가 갖고 싶어 했던 일러스트 책을 사러 보수동 책방골목에 가기로 했었는데 무리인 듯했다. 날씨가 쉬어가라고 하는 것 같다. 12시에는 경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니 집에서 쉬었다가 출발하는 건 어떤지 유의 의견을 듣기로 한다. 예전에는 일정이 취소되면 서운해했는데, "그러자, 비도 오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엄마가 나중에 약속 지킬 거잖아."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에게는 지나가는 말이라도 꼭 약속을 지키려고 했던 노력이 돌아오는 순간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침도 뚝딱 차려져 있다. 가지런한 귤만큼이나 정성이 느껴지는 아침상, 그 어떤 호텔 조식이 이보다 좋을까. 비 온 김에 쉬어가려고만 했는데 충전까지 한다.
아쉬움은 다음 계획을 위해 남겨두고
부산을 떠나기 아쉬운 유는 이미 다음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가을에 다시 부산에 오고 싶단다. 엄마가 가능하다면 일주일, 사직구장 가서 야구를 보고(롯데팬인 유는 주황색 봉다리로 꼭 응원을 하고 싶다고 한다. ), 깡통야시장에 다시 가고 싶단다. 나도 해운대 포장마차에 내편과 가고 싶다. 다음번엔 완전체로 다시 오기로 하고 경주로 발걸음을 옮긴다.
완전체
우리는 넷이 유난히 붙어 지내는 편이다. 무언가를 같이 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주방 식탁에서 일기를 쓰고, 보드게임고 하고, 그림도 그린다. 그런 우리가, 출장도 아닌 다른 일정으로 며칠을 떨어져 있었던 건 처음이다. 돌아보니 가족들이 언제나 붙어 지내고, 매일 저녁을 함께 하는 것은 드물기도 할 것이고, 당연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휴직과 코로나 이전의 나는 평일에 아이들과 저녁시간을 함께한 기억이 거의 없다. 화장실 갈 시간조차 아껴가며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달려와도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도착하는 것도 어려운 날이 잦았다. 둘째는 첫니가 올라온 것도, 첫 걸음마도 보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재우다가 울고, 밥도 못 먹고 아이를 재우는 내가 안쓰러워 울었다. 엄마로 살면서, 내 일도 지키는 것이 어려웠다. 물론 지금도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지켜가지만, 아이들의 지금과 보내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알기에, 내편도 나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어느새 경주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서 나갔는데 저 멀리서 범이가 달려온다. 유도 아빠를 향해 달린다. 가족 상봉이다. 범이가 손에 꼽으며 기다렸을 네 밤, 누가 보면 매우 긴 시간 떨어져 있다고 여겨질 정도의 속도와 표정이다. 얼굴을 보니, 서운함보다 반가움이 크다. 완전체의 시간이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경주는 지금 아이들보다 조금 컸을 때, 수학여행으로 처음 왔던 곳이다. 첨성대는 기억했던 것보다는 작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책에서 본 유적이 신기한지, 멀리서부터 신이 났다. 아이와 첨성대를 뱅글뱅글 돌며 제일 아래쪽 바닥의 돌이 몇 개인지 세어본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돌들을 함께 바라보고, 어느 돌이 마음에 드는지도 이야기해 본다. 나중에 친구들과 왔을 때 엄마랑 본 돌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사람 키보다 높은 왕릉들, 순장과 유물, 아이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만든 유적지는 아이들에게는 드넓은 놀이터가 된다. 반월성 성곽에 올라 내려다보는 경주는 평화롭다. 언젠가는 가장 호화롭고 치열했을 도시, 문화가 번성했던 곳, 통일 신라의 수도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생각해 본다. 삶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기에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할 수 없지만, 어느 순간이든 숨 고르기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울 뿐이다. 그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인 듯하다.
아이의 성취는 내가 축하할 일이고, 아이의 실패는 내가 위로할 일일 뿐이다. 아이의 성취와 실패를 나의 책임으로 내가 통제해야 할 일로 생각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것이다. 아이가 실패했을 때, 상처받았을 때, 아이를 품어주고 아이를 지켜주고 아이를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게 된다. 아이와 나 사이를 분리해야만 나는 아이가 의지할 수 있은 타인이 될 수 있다. _홍한별.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던 기억” 74면. 돌봄과 작업_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중
가족도 데이트가 필요해-
유랑 단 둘이 다녔던 지난 몇일 보다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늘었다. 더 작은 아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니, 내 눈은 범이를 쫒느라 바쁘다. 풍경을 돌아볼 여유는 많지 않다. 어쩌면, 그동안의 여행에서도 늘 더 작은 아이를 챙기는 나에게, 유가 많이 서운했겠다 싶다. 서둘러 유의 손을 잡고 걷는다. 이번 여행은 '나와 유', 둘의 시간이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한다. 단둘이 보낸 시간이 없었다면 몰랐을 차이이다.
집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느끼는 편안함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기에 발견할 수 있는 매력도 있다. 가족에게도 여행과 데이트가 필요한 이유이다. 돌아가도 소홀해지지 말아야겠다. 완전체의 시간도 소중하지만, 두 아이 각각 단 둘이 데이트 하는 시간을 꼭 만들어야겠다.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아침까지 부산에 있었던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신나게 먹었을 달콤한 귤 냄새가, 그리웠던 완전체의 숨소리가 경주의 밤을 채운다. 행복하다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밤이다.
@ 경주_2023.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