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 초딩언니의 얼렁뚱땅 섹슈얼리티 탐험: 1
서른일곱. 아직까지 매해 새 친구가 생긴다.
내게는 신경 쓸 사람의 최대 수가 제한돼 있으니 새 친구가 생긴 만큼 기존 친구가 사라진다는 말도 된다. 사람이 들고 나는 마음의 자리마다 크게 기뻐했다가 세상 꺼지듯 슬퍼하길 반복하는 나. 생로병사가 담긴 이런 관계의 생물성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슬퍼하는 데 체력이 드는 건 당연하게 여겼는데 나이를 먹으니 좋아하는 데까지도 체력이 쓰이므로, 그 자체로 생명인 관계를 몸으로 이고 나가는 게 만만찮다.
작년 말에도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 동네에 자주 가는 카페에서 만난 한 살 위의 친구 윰이다. 양성애 성향인 윰은 그때 남자랑 연애 중이었고, 어쩌다 우리는 adhd라는 사실과 어떤 부분에서 영 불통인 연애를 한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졌다. 서로의 건강하지 못한 부분을 드러내는 친근함.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약점이라 할 만한 부분을 잘 듣되 대단하게 까지는 여기지는 않는 태도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정신과 약 부작용인지 불안감이 확 올라와.”
“약 증량할 때 그럴 수 있지…(잠시 후) 너 내가 저녁으로 감자탕 먹는다고 하면 혼낼꺼지?”
“고기 그만 먹고 채소 좀 챙겨먹어 지지배야.”
정신병에 대한 말을 나눌 때는 윰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내 귀에 낯설지 않았다. 진짜 낯선 부분은 윰의 연애 이야기. 섹스(오..내 글에서 이 단어를 처음 써본다)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나는 섹스가 좋아.” 윰은 원하는 게 분명하다. 이 주제를 입밖으로 잘 안 꺼내는 내 마음의 수위에 맞춰 윰은 섹스를 ‘몸의 대화’라는 표현으로 순화해 말해준다.
“몸의 대화가 중요해. 몸이 먼저인지 마음이 먼저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몸이 가면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면 몸을 탐한다고.”
포옹과 뽀뽀면 된 거 아닐까. 그보다 마음이 가는 상대의 몸은 굳이 왜. 혹시 나 에이 섹슈얼이나 그레이 섹슈얼인가. 마음의 부침으로 몸의 대화가 귀찮았던 그때의 나는 윰의 말이 퍽 낯설어 이렇게 말했다.
“몸의 대화에 대한 내 마음은 어디 중생대 지층만큼 깊숙히 뭍혀버렸나봐. 욕구를 느끼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때로는 귀찮아. 굳이 안 해도 살 수 있고.”
내 말에 윰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인생에 꽤 중요한 부분이야.”
속궁합, 몸정. 윰과 대화하며 빈약하던 내 ‘몸의 대화’ 부문사전은 새로운 표현으로 채워졌다. 이를테면 페니스의 길이, 단단함 같은 말들. 속으로는 윰의 말에 깜짝깜짝 놀래면서 겉으로는 끄덕끄덕. 그래. 그게 꽤 중요하구나. 윰 앞에서 나는 사춘기 시절 겪어야 했던 2차성징의 미션을 건너뛰고 중년의 문턱에 진입하는 어른이 된 기분이다. 서른일곱을 먹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터놓고 말한 게 이제사 처음이라니.
대화가 쌓일 수록 나와 윰 사이에 오가는 것들이 늘었다. 윰이 생일선물로 대뜸 건네준 핸드폰 케이스. 그 친구가 텀블벅에서 구입한 물건 중에서 딸려왔던 마스킹테이프가 나에게 왔다. 그러면 나는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윰에게 명절날 갓 만든 빈대떡과 동그랑땡, 생선 전을 가져다줬다.
그런 게 고마워서였을까. 밥이나 제대로 먹으라는 내 타박과 몸 소통에 대한 여러 개념을 설명하는 윰의 말이 꾸준히 오가던 어느 날. 윰이 뭘 선물해주겠다 하더니 며칠 후 대뜸 손바닥보다 살짝 큰 크기의 종이박스를 내게 내밀었다. 박스 앞면에 ‘녹차’라고 써 있었지만 나는 알았다. 이건 차가 아니군.
“생활의 활력소가 될거야.”
윰은 장담했다. 인간의 삶에서 오르가즘을 아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느낄 수 있는 만큼 느껴본다면 생의 활력소가 될 거란 말과 함께. 집에 와서 윰이 준 선물을 풀어봤다. 진한 핑크색. 손바닥 크기의 몸통. 날렵한 곡선. 가만히 볼 때는 용도가 뭔지 짐작할 수 없는 물건. 우머나이저.
친구가 준 선물. 설명서가 영어로 써 있다.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거니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