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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Oct 24. 2023

광교에서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은  이름을 가진 곳으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간다. 광교. 다리 이름 같은 지명을 지닌 그곳은 수원시에 속한 지역이란다. 그곳에 후배가 산다. 지도 앱은 거기까지 가는 데 1시간 16분이 소요된다고 가르쳐준다. 왕복 두 시간 반. 만나는 시간까지 하면 저녁때나 돼야 돌아오겠네. 돌아오는 시간을 미리 재어보는 습관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어차피 딸도 사흘 일정으로 록 페스티벌에 가서 집에는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딸이 없는 딸의 빈집은 쓸쓸하고, 이방인의 감정을 안겨준다.   

   

신분당선으로 갈아탄 나는 욕심을 부려 챙겨 넣은 두 권의 책 중에서 소설집 한 권을 가방에서 꺼내 든다. 주말인데도 교외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은 혼잡하지 않다. 주말이어서일 것이다. 지하철은 출퇴근족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니. 그들 대부분은 닷새 동안 회사에 갖다 바친 영혼을 서식지로 데려와 수습하고 있을 테니.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일이 성가시다고 생각했는데 여정에 변화를 줘서 오히려 재미있었다. 시간도 단축해 주는 느낌.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종착역인 광교역에 도착했다. 방심한 표정으로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는데 저만치서 개찰구에 바짝 붙어선 후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딘가 낯설다 했더니 머리 모양이 바뀌었다. 머리를 묶은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숏컷이다. 그는 눈에도, 몸에도 좋지 않은 염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한다. 낯설었던 이유에는 머리 색도 있었구나. 회색빛이 절반인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그다. 그런 자신감의 소유자라면 장담하건대 그의 은발은 강경화 전 장관 못지않게 멋질 것이다. 

역사를 나오니 오른쪽 길 건너에 규모가 꽤 큰 건물이 보였다. 도서관이라고 했다. 후배는 도서관 이름이 ‘홍재도서관’이라면서 ‘홍재’가 무슨 뜻일 것 같으냐고 물었다. 누구 호인가. 후배는 크게 리액션을 하며 맞혔다고 했다. 정조의 호라고. 맞다. 정조가 지은 전집 이름이 홍재전서지. 나는 아는 척을 한다. 수원은 화성이 있는 곳이기도 하니, 광교 역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인가 보다, 싶었다. 역사적으로 사소한 연결고리라도 있으면 인접한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그걸 가져다 지역 홍보에 쓰는 것 같다고 후배가 말했다.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여섯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통하는 데가 많다는 걸 그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6개월 만에 얼굴을 마주한 첫 순간은 서먹한 감이 없지 않았다. 후배가 그 틈을 이야기로 서둘러 메꾸었다. 그는 이사 온 동네가 얼마나 살기 좋은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끊어질 듯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주말 정오 언저리였는데도 믿기지 않을 만큼 인적이 드물었다. 나와서 노는 아이들도, 산책 중인 중년 부부도 보이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초록의 무성한 나무들이 눈을 편안하게 했다. 9월 초라 더위가 가시지 않은 때인데도,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기온을 1, 2도쯤 떨어뜨리는지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산책길은 쾌적했다. 올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았고 무더웠다. 내륙인 이곳은 바다를 면한 부산과 달리 습기를 머금지 않은 공기가 바삭거렸다. 걷다 보니 과연 후배가 자랑할 만한 이유를 충분히 갖춘 동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우리 또래, 은퇴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동네라는 데 나는 동의했다. 시선이 닿는 데마다 온통 초록이고, 걷는 길이 잘 조성되어 있으며, 도시의 소음과 떨어져 고요함을 간직한 동네. 아파트와 테라스 하우스들이 일조권에 방해를 받지 않을 만큼 충분한 거리를 두고 반듯반듯하게 들어서 있었고, 그 앞으로는 예외 없이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눈을 들면 나지막한 산이 성큼 들어왔다. 나는 그곳이 부산 기장군에 있는 정관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말해 주었다. 고도 제한이 있어서 고층아파트가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 눈을 들면 가까운 곳에 높지 않은 산이 있고 나무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직장이 있던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후배가 살던 아파트를 전세로 주고 이곳에 급하게 전셋집을 구해 이사 온 지 4개월 정도 지났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살기 좋다고 말하는 후배에게 나는 그 정도로 마음에 들면 조금 더 살아본 뒤에 이 동네에서 아파트를 구매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후배는 웃으면서 돈이 없어서 안 된다고, 그러려면 대출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너무 쉽게 말했나, 싶으면서도, 사는 동네가 마음에 들기가 생각보다 어려운데, 후배가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평화로운 노후를 보냈으면 하는 생각이 컸다. 


카페 창 너머로 초록이 무성하다.


산책로를 지나 얼마를 더 걸어서 우리는 후배가 점찍어 놓은 식당으로 향했다. 점잖은 자태로 서 있는 무채색의 건물들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사무실이나 갤러리 같이도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면 식당이고 카페였다. 외관이 상업 시설 같지 않고 어딘가 격조가 있었다. 호화로운 간판을 내다 걸지도 않고, 자기 존재를 굳이 알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그 동네와 잘 어울렸다.      


처음엔 후배가 주로 말을 했는데 식당과 카페를 거치면서 나도 점점 말이 많아졌다. 우리는 각자가 수강하고 있는 그림 수업에서 그린 그림들을 공유했다. 감탄이 섞인 칭찬을 다투어하면서. 이야기는 가족과 건강 같은 것들로 숨 가쁘게 가지를 뻗어나갔다. 이야기라는 기차에 올라탄 우리는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종착역을 향해 나아갔다. 카페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갑자기 공복감이 찾아왔다. 낮에 먹은 파스타의 느끼함을 달래기 위해 비빔밥을 추가 주문해서 먹은 뒤에야 우리는 카페에서 일어섰다. 


문을 나서니 들어올 때보다 선선해진 공기가 팔뚝에 선뜻했다. 우리는 걸어온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해가 넘어갈 즈음의 산책로에서는 이른 가을 냄새가 났다. 올 때처럼 바람이 불어왔고 대기에는 물기 한 방울 없었다. 우리는 유명하다는 빵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빵 봉투를 안기고, 낮에 왔던 길을 지나 광교역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됐으니 그만 가보라고 해도 후배는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결국 낮에 나를 반갑게 맞아줬던 개찰구까지 와서야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좋은 만남이었다. 포만감이 드는 게 조금 전에 먹은 비빔밥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내가 탄 전동차가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철없는 초로의 여인을 반겨줄 친구가 광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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