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예매분 티켓을 허하라
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린 지 한참 지난 지금 뒤늦게 감상을 정리해 본다.
해마다 10월이 다가오면 마음이 분주해진다,라고 쓰려고 보니 그러기에는 현재 내 마음이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나이가 들어서 열정이 사그라든 걸까.
SNS도 하지 않는 나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눈앞에 바짝 다가온 영화제와 맞닥뜨린다. 부국제 책자가 시중에 배포되고 예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보고 싶은 영화의 목록을 만드는 일이 이제는 즐겁기보다 힘들게 느껴진다. 책자 속 깨알 같은(비유가 아니라 실제 크기가 딱 깨알만 하다. ) 활자를 인상을 찌푸려가며 보는 일은 허공을 걷는 느낌이다.
퇴직하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영화제의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지리라 굳게 다짐했다. 퇴직하던 해 코로나가 세계를 뒤덮었다. 영화제가 시작된 이래 영화의 전당 앞 광장이 그렇게 한산한 적은 처음이었다. 세계 각국의 영화인 초청 행사도 당연히 생략되었다. 영화관 좌석에는 한 칸 건너서 테이프가 붙었다. GV는 영화 상영 전, 감독이 보내온 짧은 영상으로 대부분 대체되었다. 살풍경한 시절이었다. 나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마스크를 단단히 끼고 영화를 관람했다.
팬데믹이 끝나고 영화제는 예전의 모습을 서서히 찾아갔다. 그러나 수년째 이어진 집행부발 잡음으로 뒤숭숭하다. 최초에 순수함과 열정으로 시작된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안 좋은 것들이 누적되는 건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문제가 생기기 마련인 건지. 결국 올해는 집행부 없이 영화제가 열렸고, 송강호 배우가 호스트 역할을 맡아 손님을 맞는 모습이 뉴스 화면에 나왔다.
퇴직 전의 다짐이 무색하게, 영화제에 대한 설렘의 강도는 회차가 거듭되면서 조금씩 잦아들고 있음이 분명하다. 초심을 잃은 게 나인지, 영화제인지 모르겠다.
코로나 시기에 현장 예매가 없어진 이후, 현장 예매분을 남겨놓지 않고 전 좌석 온라인 예매로 예매 시스템이 바뀌었다. 그러니 나처럼 손이 느린 사람은 보고 싶은 영화를 볼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올해는 그래도 딸의 조력을 받아 우선순위에서 윗자리에 있었던 몇 개 영화를 딸과 함께 관람하는 행운을 맛보았다.
나이가 들어 집중력이 약해진 탓인가. 에너지가 줄어든 탓인가. 올해는 전처럼 상영작 소개 글을 하나하나 정독하는 열정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냥 슬쩍 한번 보고 느낌이 오는 영화를 골랐다. 올해는 영화를 선택할 때 한 가지 원칙만을 적용했다. 국내 개봉의 가능성이 희박하면서 평소 접하기 힘든 국가의 영화. 그것이 실패할 확률이 높은 방법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프로그래머들의 소개 글에 담긴 뉘앙스와 실제 영화 내용의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는 것 또한 실패할 확률을 높이는 요인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간과한 또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이제까지는 실패의 위험을 줄이고 안전하게 가기 위해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들을 우선 선택했다. 그런데 올해는 그 원칙을 잊고 영화 소개 글 상단에 붙은 영화제 수상 기록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올해 내가 선택한 영화들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정보가 없는 상황이라는 점은 달라진 게 없는데도 예전과 같은 감을 잃어버린 이유가, 내게 영화 외에 즐길 것들이 더 많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내가 픽한 영화에서 실패한 대신, 꼭 보고 싶은 영화지만 처음부터 지레 예매 의지를 접게 만드는 화제의 영화를 딸 덕에 볼 수 있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홍상수 감독의 <우리의 하루>. 두 작품 모두 머지않아 개봉될 영화라 나만의 원칙에서 벗어나지만, 전자는 영화가 끝난 다음 무려 (감독과의) ‘스페셜 토크’가 있었고, 후자는 GV(감독의 등장을 내심 기대했으나, 기주봉 배우를 비롯한 몇몇 배우들만 참석했다. )가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선택한 영화 중에서는 그나마 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가 세 작품 정도가 된다. 사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시의성이 있는 소재인, 교사에 관한 영화를 두 편 골랐는데 그중에 한 편은 다른 영화를 예매하느라 깜빡하고 잠깐 늑장 부리는 사이 매진이 되어버렸다. <티처스 라운지>라는 독일 영화이다. 취소 표가 나오겠지, 하고 수시로 예매 사이트를 들락거렸으나 결국 상영 당일까지 취소 표를 구하지 못했다. 국내 개봉이 성사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다른 해에 비해 나의 예매 성공률이 유독 낮았던 것은 앞서 말한 100% 온라인 예매 시스템 때문이기도 하고, 이렇게 표를 구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웬만해선 취소를 하지 않으려고 해서인 것 같다.
자꾸 옛날 이야기를 해서 그렇지만, 그래도 충정에 가까운 마음으로 말을 해야겠다.
예전에는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온라인에서 매진되어도 희망이 있었다. 상영 당일 현장 예매라는 기회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현장 예매는 가능하지만, 온라인에서 매진이 안 되었거나 중간에 취소 표가 나온 경우에만 표를 살 수 있다. 영화제가 시작됐다는데 영화나 한 편 볼까, 하며 기대감을 품고 나왔을 중년, 노년의 관객이 그날 상영하는 영화가 모두 매진되었다는 말에 매표소 앞에서 허탈하게 발길을 돌리는 장면을 여러 번 목도했다.
예전에는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상영되는 날이면 아침 일찍 영화의 전당으로 향했다. 서둘러 집을 나선다고 했는데도 비프힐 1층 매표소에 도착해 보면 긴 줄이 이어져 있기 일쑤였다. 줄 끄트머리에 서서 오래 기다린 끝에 운 좋게 원하는 영화 티켓을 구했을 때의 기쁨은 영화제의 또 하나의 묘미였다. 이제 이런 풍경이 사라지면서 영화제 현장의 활기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코로나도 진정이 되었고, 조만간 영화제 집행부도 정상화되면 예전처럼 티켓의 일부는 현장 예매분으로 남겨두어 온라인 예매에 실패해도 두 번째 기회를 얻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한 가지, 정식 매표소 말고도 상영장 한편에는 영화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성이며 대기하는 또 다른 장소가 있었다. 사정이 생겨 영화를 못 보게 된 사람들이 티켓을 맡기면 자원봉사자들이 원하는 사람에게 대신 팔아주는 부스다. 큼지막한 화이트보드에 누군가 내놓은 영화 티켓을 붙인 뒤 영화 제목, 상영 시간, 상영관 등 정보를 써놓는다. 부스 주위에서 표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서 구매 의사를 말하는 이가 있으면 바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아날로그적이어서 더 정겹고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랜덤으로 구한 영화를 보는 재미도 의외로 쏠쏠했다. 운이 더 좋으면 누군가 무료로 내놓은 표를 득템 할 수도 있었다. 이 부스도 부활했으면, 하고 나는 바란다. 문화 관련 예산 배정에 역대급으로 인색한 현 정부가 내년에는 지역 영화제 관련 예산을 50%나 삭감한다니 영화제가 예전의 풍요로움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무래도 내 희망 사항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영화제가 다가올 때마다 하는 결심 중에 ‘올해는 무리하지 말자.’라는 게 있다. 올해는 그 결심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켰다. 무리하지 않은 것 하나는 확실하다. 관람 스케줄 메모장이 널널했다. 하루에 많아야 두 편, 주로 한 편씩 관람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데가 많아지다 보니 에너지가 분산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년에는 나만의 원칙을 재조정해서, 다시 안전하게 세계 영화제 수상 작품을 우선으로 관람작을 선택할까 싶다. SNS는 하지 않아도 영화제 시작 전에 화제작을 미리 검색해 놓는 방법도 있겠다.
영화제 책자 속 깨알같이 작은 활자들을 보면서 막막함을 느끼고, 화제의 영화 근처에는 아예 접근할 마음을 접었던 나. 그러나 한편 올해처럼 힘을 빼고 영화를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선택의 성패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모든 상영작에 깃든 감독의 노력에 똑같은 가치를 매기는 일도 괜찮은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영화제를 즐기는 진정한 자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