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섬 Jul 02. 2015

그 놈의 첫 문장 때문이야

아무것도 쓰지 못한 1년을 기리며

"첫 문장이 안 써져... 

며칠째 빈 화면을 들여다봐도 도통 떠오르지가 않아"

오스터 냥은 털을 고르다 무심히 말했다.

"첫 문장? 그런 건 멋대로 써버려."

"새 공간에 쓰는 첫 문장인데, 막 써버리라고?

모처럼 뭔가를 쓰고 싶은 공간을 찾았단말야.

그런 곳을 첫발을 딛는 건데 이왕이면 멋지게 시작하고 싶다구."


오스터 냥은 앉은 채로 한쪽 다리만 치켜들어 가랑이 사이를 막 햝던 참이었다. 

그 기묘한 자세를 유지한채 고개만 들어 말했다.

"니가 필명을 만든 게 언제더라."

그리고는 다시 가랑이 사이를 정성껏 핥기 시작했다.

정성을 들여, 꼼꼼하게.

그 혀놀림을 지켜보면서 필명을 만든 때를 되짚어보다

'벌써 1년' 노래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말았다.



벌써 1년이 지났지만



'강섬'이란 필명을 만들었다. 

글쓰기만을 위한 새로운 자신을 만드는, 

일종의 의식 같은 일이었다.

심지어 명함까지 만들면서 다짐했다.

이 이름을 가진 나는 오직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짐작하시다시피, 

강섬이란 녀석은 여전히,

이름 두 글자만 가지고 있었다.  

강섬이란 이름만 가진 녀석은 

단 한 글자도 아직 쓰지 못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그놈의 첫 문장 때문이다.


새로운 자신까지 만들고,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하려는데

아무 문장으로나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글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할  완벽한 첫 문장을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1년이 지나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거



1년 뒤에도 그 1년 뒤에도



강섬이란 녀석은 첫 문장을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쩐지 끔찍한 느낌에 몸이 떨려오더니

노래 뒷부분에 기가 막힌 바이브레이션이 들어가버렸다.

오스터 냥이 털고르기마저 중단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을 정도니,  에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던 오스터 냥은 

늘상 하듯 얼마 전 읽은 책의 구절을 냥냥거렸다.

정말로 재능 있는 사람이 쓰면 걸작이 되죠. 
하지만 대부분은 흉내만 낸 것들이에요. 
기왕 흉내를 낼 거면 검은 바탕에 검은색 말고
다른 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낫죠.

"이번에는 무슨 책?"

"이사카 코타로의 '사신의 7일'

갑자기 미안하지만 말야, 

고양이 꼬리를 걸고 말하건대 네게는 '정말'이라고 할만한 재능이 없어."

나는 움찔했다. 

누구도 해주지 않았지만 정확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걸작을 쓰지 못할 거라면 말야, 

네 멋대로 한 번 써보기라도 하라고.

재능 없다는 사실을 대면하는 것에 겁먹고 피하지만 말고 말야."

오스터 냥은 한 마디를 덧붙이면서 다시 털고르기에 집중했다. 

"니 첫 문장을 기억하는 건 오직 너뿐일 걸"


충격을 안 받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솔직히 나는 아직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엄청난 재능이 꼭꼭 숨겨져 있을 것이다. 

다만 드러내지 않을 뿐이야.


쓰지 않는 동안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쓰는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써온 것들을 볼 때 

내게는 '정말'이라고 할 만한 재능이 없다는 걸.


인. 

정.


비로소 첫 문장을 쓸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해서 쓰지 않는 습관이 고쳐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주저하기를 반복했다.

며칠이 지난 뒤, 드디어 첫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첫 문장이 안 써져'로 시작하는


강섬이란 자의 첫 문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