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촉감이 있지요
도돌도돌, 쓰다듬어보니 재미있는 촉감이다 싶었다. 제작비를 아끼지 않고 만들었다는데 너무 기대를 했나, 표지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책을 들고 읽어나가다가 문득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세상에, 책을 들고 읽을때 느낌이 너무 좋더라. 오돌오돌한 부분들이 책이 미끄러지지않게 딱 잡아주는 동시에 책등을 잡고 있는 감촉이 보들보들 좋아서 들고 읽는 맛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런 감각을 느껴보면서 책을 읽는것도 처음이네. 난다출판사에서 나온 은희경 작가의 '또 못 버린 물건들' 이야기다.
사진만 봐서는 절대 알수 없는 그런 촉감들. 갑자기 이 책의 물성을 느껴보고 싶었던 건 김민정과 황인찬의 인터뷰 덕분이었다. 이 인터뷰는 너무 좋아서 종종 다시 듣겠다고 찜해놓은 에피소드다. 김민정 시인은 예전 '문장의소리' 진행할때 정말 즐겨들었었는데,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는 동시에 책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어찌 이리 넘쳐나는지 늘 감탄하곤 한다. 여기서는 황인찬 시인과 어찌나 이렇게 쿵짝이 잘 맞는지, 너무 유쾌하면서도 책과 일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 전해져 따뜻해진다. 지름신이 마구 내려오던 에피소드라는 건 주의!
김민정 시인은 책만들때 제작비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출간했던 '또 못 버린 물건들'의 표지 종이는 너무 비싸 다른 곳에서 엄두도 못 낼 정도라며, 국내에 유일한 표지일 꺼라 자부하는 말을 들으니 너무나 궁금해졌던 거다. 첫인상은 살짝 실망이었는데, 읽으면서 그 진가를 느껴보고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책의 촉감에 집중하면서 읽는건 처음 해보는 일이었는데 또다른 즐거움이 되고 있다.
(그런데 내부종이가 뻣뻣한 코팅종이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질감인게 넘 아쉬웠다는 ㅠㅠ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종이질감은 뭐였을까, 최근 책장을 넘길때 가장 기분 좋았던 책을 생각해보니 돌베개에서 나온 <서평가의 독서법> 책의 종이였다. 조금 얇으면서도 투명하고, 아주 부드러운 종이. 아, 예전 사전의 종이질감과 비슷하구나.)
김민정 시인의 말을 듣다보니 책을 이루는 하나하나가 다 이유가 있고 고민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인데, 그동안 책의 물성은 소홀히 보지 않았나 싶었다. 그 뒤로 책을 읽을때마다 물성을 자세히 살피게 된다. 보는 세상이 조금은 더 넓어진 기분이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책을 거의 정리하고 전자책으로 옮겨갔는데, 이 물성 부분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물성이 마음에 드는 책은 소장해도 괜찮겠다고 다시 생각을 바꾸는 중이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이제 국내 대표시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고, 보지는 않더라도 제목과 색감을 즐기게 되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이 시인선이 만들어졌던 뒷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 아주 흥미로웠다. 김민정 시인이 2년 동안 고심해서 이 초안을 만들었다는 것과 신형철 평론가도 함께 했었다는 것. 기존 시집과는 레이아웃 자체가 달라서 시인들도 당황했었다는 이야기. 초반에는 반대가 너무 많았고 지적도 많았는데 그런 것들을 다 헤쳐나가면서 이 시인선의 기본틀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굉장했다. 이제는 독보적이자 대표적인 시인선이 됐고 200권이 넘는 긴 여정을 헤쳐나왔다. 세상에나, 시집이 200권 시리즈가 넘어가다니. 그만큼 시리즈 팬이 많아다는 이야기다.
지금 200호 특집으로 199권에 담긴 '시인의말'을 모아 묶은 시인집이 3000원 특가로 판매 중이다. 찍을수록 손해여서 곧 절판이라 하니 기념삼아 사보기도 딱 좋다. 200호 기념 세트로 구매했는데, 굿즈인 빈칸노트와 시읽기자도 마음에 들어서 아주 만족스러운 지름.
사실 이제 200권까지 오다보니 디자인은 너무나 익숙해져서 뻔하다는 느낌도 있었는데, 만든 이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또 달라진다. 이번에는 표지색깔과 글자체, 행간의 구성 같은 것도 집중해서 보게 된다. 심지어 종이질감은 어떤지도 집중해서 만져보게 된다. 정성을 들여 만들어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읽으니 이전에 읽던 느낌과는 다르다. 시각적인 즐거움과 책의 냄새, 촉감들을 느껴보게 된다.
문학동네시인선 200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빈칸노트저자문학동네출판문학동네발매2023.10.16.그런 김민정 시인이 이제는 시인선을 떠나 또하나 재미있는 일을 기획중이라고 했다. 시의적절 시리즈로 매달 시인들이 릴레이로 한달 분량의 글을 자유롭게 채워내는 시리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구매했다. 받자마자 책을 이리저리 쓰다듬으면서 이제는 감촉부터 확인한다. 색감이 무척 좋고, 익숙한 새책 냄새가 뿜어져나온다. 이번은 촉감에 집중하면서 천천히 또 읽어봐야겠다.
읽을, 거리저자김민정출판난다발매2024.01.01.참, 난다출판사에서는 매년 초 멋진 다이어리를 굿즈로 내어놓는데, 이번은 화가 김수강과 함께한 다이어리다. 주간다이어리인데, 그림 보는 맛이 좋아 매년 꼭 사보곤 한다. 가격도 1700원. 품절되면 다시는 못 보는 다이어리이니 노트 좋아하는 분은 얼른 구매하세요~
그러고보면 정말 김민정 시인은 책영업자로서도 굉장한 자질. 인터뷰 듣다가 몇 권을 사게 된건지 ㅎㅎ
PS. 시리즈에 이후 계약된 시인들 이름을 듣다가 시를 썼었던 아는 동생 이름이 거기 끼어있기에 깜짝 놀랐다. 언제 등단한거야, 나오면 조용히 축하해줘야지 기다리고 있다가 책을 받으면서 그 목록부터 확인했더랬다. 가는 귀가 먹었나 성만 같고 이름은 달랐다. 얼핏 들으면 또 비슷한 이름이기도 하네 ㅎㅎ 혼자 웃으면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주며 오랜만에 안부를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