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째깍째깍 돌아가고, 대로변 차들은 흐어응 달려갈고 나는 고요히 소파에 앉아 있다. 누워 있다는 표현이 맞을까. 반쯤 앉아 있고 반쯤 누워 있다.
이 자세. 다리는 발목을 교차시키고 손은 가지런히 모아 배꼽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밑 소중한 부분도 아니고 오줌보쯤 될까. 조용히 눈 감고 있으면 이 곳은 잊지 못할 발리의 호텔이요, 고향집 아늑한 거실이다.
식탁에서 과일의 향기가 오는 것도 같고,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오는 것도 같은, 바깥의 역동성과 침실의 차분함을 이어주는 경계 같은 곳. 운동 경기가 막 시작되기 전의 락커룸 같기도 하고, 경기가 모두 끝나고 하루를 마무리 하는 버스 안 내 좌석 같기도 하다.
때로는 영화관 VIP 좌석이고 때로는 하와이 비치의 선베드다. 거실 소파의 아주 유용한 아이템, 비치 타월은 소파 곳곳에 비치되어 때로는망토가 되어 나의 등을 따듯하게 데워주기도 하고, 언젠가는 이불, 언젠가는 베개가 되어주기도 한다.
비치 타월은 고향집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습관이다. 술 취해 아무렇게나 누워 있어서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 곳, 옷 벗고 있든 입고 있든, 머리를 감든 감지 않든, 나를 무한히 받아주었던 그 고향집 소파 한편에 있던 그 타월 말이다. 추우면 이불이고 더우면 땀 베개가 되었던 그 타월의 역사도 소파와 함께 이어진다.
때로는 끈적끈적한 땀이 싫기도 했겠지만 제 살색이 변하는 아픔도 감수하며 그렇게 나를 감싸주던 고향집 소파는 20년째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굳이 아침 해를 거실 소파에 앉아 맞이하며 명상하는 까닭은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소파의 푸근함과 너그러움, 넓은 마음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게다. 멀리 있는 엄마의 따듯함을, 굳이 엄마를 따라 하며 비치 타월을 사서 소파 한쪽에 옮겨 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고향집 소파에 스며있던 엄마의 온기를 그렇게 서울에서도 느끼고 싶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