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장마, 짧은 여름
장마 덕일까. 긴 여름이 얼추 다 갔다. 오늘은 모처럼 햇볕이 내려쬐건만, 에어컨 바람과 함께 블라인드로 해를 가리니, 거실은 카페처럼 시원하고 붉은빛 수박은 보기 좋게 놓여있다.
여름을 싫어하는 이도, 좋아하는 이도 있겠으나, 나는 여름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여름의 그 후덥지근한 바람과 끈적임을 알 것이다. 부산의 여름은 유난히 길고 장마도 극성이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후 좋았던 점 하나는 장마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 여름 바람이 부산만큼 끈적이지 않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그래서 내 고향 부산이 싫다는 건 아니다. 더 넓은 바다를 보며 자라는 부산의 청년기는 거침없이 꿈꾸고 큰 배포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니까, 해운대 밤바다의 재미는 서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으니까.
어릴 적 여름이 덥고 습하게 느껴진 까닭은 에어컨 없이 살아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중고등학교 시절, 에어컨은 고사하고 교실에 선풍기 1대 겨우 더 들여다 놓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 축구 한 게임 뛰고 오면 모두 런닝 바람으로 오후 수업은 잠을 청하는데, 그때 하얀 커튼이 휘날리며 창 너머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이 비록 뜨거운 바람일지언정 그 바람 시원히 맞으며 눈이 감기곤 했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여름의 뙤약볕을 일부러 찾아서 간다. 실내에만 있으면 오히려 추워서 냉방병에 걸리고 여름이 정말 맞나 잠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야 여름을 실감한다. 그리고 얼른 다시 실내로 들어온다. 실내가 시원하면 시원할수록, 뽀송하면 뽀송할수록, 밖은 덥고 습하다. 혹여나 집에 에어컨이 고장 났거나 아예 없는 경우에는 밖의 날씨가 그저 견딜 만 하지만,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는 집일수록 밖으로 나오면 너무 덥다, 너무 더워를 입에 달고 살게 된다. 요즘은 양극화의 시대라는데, 더위에 대한 체감도 양극화라고 할까.
나도 에어컨과 제습기의 사치를 누리고 있다. 2020년 여름 장마는 유달리 길어서 에어컨 만으로 제습이 안 되어 견디고 견디다 쭈글거리는 벽지들을 보며 더 이상은 못 견디고 제습기를 구입했다. 세탁기는 세탁기고 건조기는 건조기라고 했던가. 세탁기와 건조기가 일체로 나오는 상품보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따로 사는 구매가 보편화되었다. 에어컨에 제습기능이 있지만, 에어컨과 제습기를 따로 사는 이유도 그런 이치라고 할까. 각각의 상품의 제 역할이 분명 있나 보다. 제습기와 에어컨을 같이 돌리자 물먹었던 벽지들이 다시 펴지기 시작한다. 뭐든 본전을 찾을 것 같으면 고민하지 말고 진작에 사야 한다. 장마 말미에 제습기를 구입한 나의 행동이 원망스럽지만 제습기를 옷방으로 가져가 제 역할 톡톡히 하도록 할 참이다.
긴 장마가 간다. 여름도 함께 간다. 막바지 더위가 며칠 될 것 같은데, 이 더위 끝나면 여름이 있어나 싶을 정도로 가을이 올 것이다. 가을이 오면 햅쌀, 햇사과, 여러 농작물 맛있게 먹어야지. 그러다 보면 또 겨울이 오겠지. 그러면 추위가 싫다고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이 오면 더위가 싫다고 겨울을 기다리는... 아둔한 인간의 삶을 계속 살고 있겠지.
여름이 간다고 하니, 왠지 일 년의 절반이 훌쩍 가고 곧 한 해가 다 갈 것만 갔다. 우리는 2020년 무엇을 했던가. 그리고 무엇을 더 해야 할 것인가. 여름의 끝자락이다.
2020. 8. 17. 밖은 폭염주의보, 안은 시원한 26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