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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송이 Dec 14. 2020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다

길고도 질겼던 나의 꿈

'대학교 4학년'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비슷한 풍경들이 있다. 도서관 열람실에 모자를 눌러쓰고 앉아 기계처럼 자소서를 써대는 뒷모습,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모여 풀어대는 인적성 문제집 속 정체불명의 전개도들, 졸업 후 사회초년생이 된 선배들이 사주는 술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 손에 쥐어진 반짝거리는 명함들.  


하지만 나의 4학년은 조금 달랐다. 자소서를 쓰는 대신 대본을 썼고, 인적성 문제집을 푸는 대신 신문을 읽었으며, 직장인 선배들의 명함 대신 유명 작가들의 인터뷰 글들을 손에 쥐고 걸었다. 나는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12살, 사춘기가 찾아왔다. 부모님의 관심은 모조리 간섭으로 느껴지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기 시작하던 때였다. 매일 저녁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지옥 탈출’ 게임을 한 후 밤 8시가 넘어서 귀가하는 그야말로 12년 인생 최대의 일탈을 이어가던 어느 날, 방에 돌아와 보니 책상의 풍경이 어딘가 낯설었다. 다시 보니 못 보던 라디오 하나가 무심하게 놓여있었다. 앞에는 테이프를 꽂을 수 있고 오른쪽 끝에는 쭈욱 뽑으면 끝도 없이 늘어나는 은색 안테나가 달린 보라색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버튼을 이리저리 돌리자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뉴스가 나왔다가 발라드 음악이 나왔다가 갑자기 사연을 읽는 디제이의 목소리가 나왔다.


몇 번의 방황 끝에 버튼이 멈춘 곳은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던 채널이었다. 차이코프스키가 누군지, 현악 4중주가 뭔지 개뿔도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 선율을 듣고 있자니 제멋대로 날뛰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그날 이후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라디오를 들었다. 클래식 채널로 시작한 나의 라디오 여정은 SBS Power FM에 정착했다. 나는 친구들과 밤늦도록 ‘지옥 탈출’ 게임을 하는 대신 매일 밤 10시 책상 앞에 앉아 '텐텐클럽'을 들었다. 그 조그만 라디오를 통해 서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사연을 나누고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한다는 게 너무나도 낭만적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방송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그렇게 ‘방송작가’의 꿈이 시작됐고, 13년 후 나는 진짜 '방송작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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