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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송이 Jun 07. 2020

사라진 아버지의 꿈, 그리고 나의 꿈

조용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라진 아버지, 그리고 나의 꿈을 떠올린다.

유난히 음악을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다. 노래를 잘 불렀고, 기타도 곧잘 쳤다. 학교를 마치면 가방을 던져놓고 뒷동산에 올라가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이 소년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소년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팝송을 따라 불렀고, 용돈을 아끼고 아껴 LP판을 하나씩 사모았다. 음악은 소년을 설레게 하는 유일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6남매 막내아들에겐 결국 사치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물 남짓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과 패기밖에 없는 시골 촌놈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자장면집, 세탁소, 부동산. 닥치는 대로 일했고, 끊임없이 돈을 벌었다. 서울살이는 생각보다 훨씬 녹록지 않았다. 본래 사람을 잘 믿고 마음이 여렸던 그는 쉽게 배신당하고 자주 상처 받았다. 그의 푸릇했던 꿈은 회색빛 도시에서 그렇게 점점 색을 잃어갔다.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득 옆을 봤을 때, 그의 곁에는 그를 바라보는 한 여자와 두 아이가 있었다. 종종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떠돌며 기타 치고 노래하는 꿈을 꿨지만 책임감이라는 이름이 그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그는 계속 앞만 보고 달리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꿈 많던 청년은 아버지가 되었다. 나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린 시절 노래방은 주말 외식 후 필수 코스였다. 술 몇 잔에 기분 좋게 취한 아버지는 유난히 조용필 노래, 그중에서도 '꿈'이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다. 한 손에는 마이크를, 다른 손으로는 마이크 줄을 감아쥐고 눈을 감으며 노래를 부르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한다. 특히 명절날 온 친척이 다 모인 자리는 아버지에게 가장 큰 무대였다. 후진 시골 노래방 기계 반주에 어울리지 않는 열창에 술에 잔뜩 취한 친척들의 뜻 없는 환호가 더해지는 순간 아버지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노래를 마친 후 마이크를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올 때면 항상 씁쓸한 미소를 짓곤 했는데, 그 미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건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일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꿈'이라고 불러왔던 일이었다. 대학 졸업을 한 달 앞둔 1월, 운 좋게 공채에 합격했고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연하기만 했던 상상이 손에 잡히는 현실이 됐다는 생각에 취해 한동안은 마취가 덜 풀린 듯 살인적인 업무 강도도, 선배들의 폭언도, 형편없던 보수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약발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현실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고, 선배들의 식사를 직접 갖다 주고 반납했으며, 주급 25만 원을 받았다. 그렇게 꿈이라고 믿고 뛰어든 세계에서 그 꿈은 오히려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매일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이대로 저 건물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차에 치여 뒤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퇴근길 지하철에서 남은 일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이어폰을 꼽았을 때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던 조용필의 '꿈'이었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이 노래가 이렇게 가슴 아픈 노래였던가. 노래를 듣는 내내 오래전 들었던 아버지의 빛바랜 음악의 꿈과 눈을 감고 이 노래를 열창한 후 짓던 씁쓸한 표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이후 나는 퇴근길, 술 한잔이 간절할 때마다 술을 먹는 대신 이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노래 속 조용필의 숨소리까지 모두 외웠을 무렵 내 꿈도 결국 그 빛을 다하고 말았다. 회사 앞까지 태워다 준 엄마를 바로 앞에 두고도 이대로 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정말 차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자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을 때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오랜 꿈을 포기해야 했다. 일을 그만둔 후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그제야 아버지의 그 씁쓸한 미소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다. 그건 오랜 시간 간절히 바라왔던 꿈을 결국 포기해야 했던 회한과 체념이었다.



아버지는 요즘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정리하시고 색소폰을 배우고 계신다. 가끔 연습한 곡을 녹음한 파일을 들려주시고는 멋쩍은 표정으로 내 반응을 물으실 때면 마음이 짠해지곤 한다. 너무 멀리 돌아왔지만 이제야 아버지가 조금씩 자신의 꿈을 찾아나가는 것만 같아서다. 그런 아버지로 인해 내게도 새로운 꿈이 생겼다. 돈을 많이 벌어서 언젠가는 아버지를 위한 LP 바를 차려드리고 싶다는, 아주 막연하지만 근사한 꿈이.  


그리곤 상상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씁쓸함이 아닌 기쁨으로 조용필의 '꿈'을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때는 누구보다 뜨거웠을 아버지의 젊은 나날을 닮은 노래를, 커다란 빌딩 숲 속에서 매일 같이 밤을 새우며 꿈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힘겹게 버티던 그 시절의 나를 닮은 노래를. 우리의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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