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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송이 Dec 17. 2020

방송작가, 방송잡가.

'작가'라기보단 '잡가'에 가까웠던.

방송작가가 된 후 가장 많이 받는 질문 TOP3.


1. 연예인 누구누구 봤어?

2. 그중에 누가 제일 예뻐? (또는 잘생겼어?)

3. 아니 그래서 너는 무슨 일 하는데?


1번과 2번은 단답식이지만 3번은 (매우) 주관식이다. 가끔 방송에서 '출연자에게 억지로 이끌려 나와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나 지미집 카메라에 걸리는 '스케치북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는 칸이 모자랄 정도로 주관식이다.


처음 방송국에 발을 내디뎠을 때의 설렘, 하루 종일 방송국 출입증 (사원증 아님)을 목에 걸고 다니며 느꼈던 뿌듯함, 누군가에게 나를 '방송작가'라고 소개할 때의 짜릿함. 하지만 아름다운 환상은 구름처럼 금세 사라지고, 구름이 걷힌 자리에는 현실만이 남았다. '작가'를 꿈꿨지만 '잡가'에 가까웠던 나의 막내작가 시절은 이러했다.


아침 | 아이템 전쟁


나의 막내작가 생활은 눈을 뜨자마자 노트북을 켜는 것으로 시작했다. 오늘 회의에 발표할 코너 아이템을 서둘러 써야 하기 때문이다. '트렌디함'이 생명이었던 프로그램 성격 탓에 새로 나온 영화, 드라마, 예능은 물론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짤이나 밈까지 전부 다 뒤지며 매일 미친 듯이 아이템을 찾아 헤맸다. 특히나 막내인 나는 가장 젊다는 이유로 더 트렌디한 아이템을 더 많이 찾아야 했다.


출근길에도 아이템 쓰기는 계속된다.


출근 시간은 전적으로 메인 PD님과 메인작가님의 의사로 결정된다. 대체로 오전 11시~오후 1시 정도.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은 언제나 이 대목에서 "와, 개부럽다"를 외치지만 곧 숙연해진다. 막내작가인 나는 1,2시간 정도 일찍 출근해 모든 작가들의 아이템을 취합하고, 프린트하고, 회의실을 청소하며 회의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점심 | 회의, 회의, 그리고 회의


모든 작가진과 메인 PD님이 모이면 그날의 회의가 시작된다. 금주에 섭외된 게스트와 그에 맞는 코너 아이템에 대해 각자 발표하고 괜찮은 아이템을 선정해 디벨롭하는 시간. 물론 발표 순서는 '짬 순서대로' 메인작가님부터다. 당연히 막내작가인 내 차례가 올수록 모두의 집중력은 떨어지고 새벽부터 아침까지 열심히 써 내려간 아이템은 종이를 넘기는 휘리릭 소리와 함께 휴지통으로 금세 사라진다. "요즘 막내들 아이템이..." 하는 선배님들의 한마디에 심장이 쿵-하고 떨어진다.


아이템이 잘 안 풀리면 회의가 길어진다. 모두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화살은 종종 막내작가에게 겨눠진다. "막내들, 요즘 뭐 핫한 거 없어?" 나에게 쏟아지는 몇십 개의 날 선 시선. 누가 내 목을 조르는 듯 숨이 턱턱 막혀온다. 회의가 길어지면 종종 커피 심부름을 다녀오곤 했는데 길고 숨 막히는 회의실을 잠시나마 벗어나 카페에 가서 커피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눈물 나게 행복하게 느껴졌다.


저녁 | 불편한 식사


함께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는 뜻은 회의가 결국 잘 풀리지 않았다는 뜻이자 고로 저녁 식사 후 다시 회의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식사는 시간 절약을 위해 주로 지하 식당에서 다 같이 먹었는데, 나를 비롯한 막내작가들은 주로 끝자리에 앉는 것을 선호했다. 음식이 나오면 선배님들의 자리에 직접 갖다 줘야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유롭게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밥을 빨리 먹고 회의를 빨리 끝낸 후 퇴근하려는 선배님들의 속도에 맞춰 허겁지겁 숟가락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내가 만성 역류성 식도염을 앓게 된 것도 아마 이때부터였으리라.


새벽 | 또다시 아이템 전쟁


기나긴 회의가 끝나고 뒷정리를 한 후 집에 돌아오면 자정에 가까운 시간. 나는 다시 노트북을 켠다. 내일 새로운 아이템을 발표해야 하기 때문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쏟아지는 새로운 콘텐츠들을 찾아 유튜브, 커뮤니티를 헤맨다. 노트북을 배 위에 올려놓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면 다시 아침이다.


이 생활을 5일 반복한 후 촬영, 그리고 회식을 한 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또 한 주의 시작.


이상했다. 분명 나는 작가 준비를 할 때 매일 대본을 쓰는 연습을 했는데, 내가 작가가 된 후 쓰는 글이라고는 아이템과 선배님들의 커피 주문 목록 밖에 없었다.


이상했다. 나는 분명 '방송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선생님께 혼나는 학생처럼 작가 선배님에게 혼이 나 회의실 밖에 벌을 서듯 서있고, 그런 선배님의 자리에 꼬박꼬박 커피와 식사를 갖다 놓아야 했다.


수많은 '이상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아이템을 쓰고 커피 심부름을 하고, 선배님의 자리에 밥을 갖다 놓았다. 막 '방송작가'라는 일생일대의 꿈을 이룬 내게 그건 '진짜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 무조건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유명한 작가 선배님이 그러했듯이, 내 옆에서 함께 커피 주문을 받고 있는 작가 동기가 그러하듯이. 그렇게 나는 '방송작가'가 아닌 '방송잡가'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이 과정 끝에 분명한 보상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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