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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쨌든 Aug 24. 2020

고3의 데빌드 에그와 페이스트리 빵

고속 성장 시대 중산층 음식 자서전 17

오래전부터 나의 유년 시절 앨범에서 유난히 눈에 띄던 사진이 있다. 한 권짜리 유년 시절 앨범을 예전엔 아주 가끔, 요즘 자전 에세이를 쓰면서는 꽤 자주, 들춰 보게 되는데, 그 때마다 그 사진이 보이면 좀 오래 멈춰서 쳐다보곤 했다.



이제 고3이 되는 것이던 고2 겨울방학 때, 내가 가족을 위해 크리스마스 만찬(?)을 준비했던 사진이다. 고1과 고2 초반까지 팽팽 노느라 성적이 좋지 않았고, 뒤늦게 입시 준비를 한다며 코피까지 흘려가며 공부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되었는데, 갑자기 나는 요리가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엄마에게 뜬금없이 외쳤다. “크리스마스 만찬은 내가 준비할게!”


그 동안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가사 실습 시간에 요리를 해봤고 가끔 집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마늘을 까며 요리하는 엄마를 지켜본 적은 있지만, 내가 직접 요리를 하거나 체계적으로 배운 적은 거의 없었다.


그때 집에 엄마가 구입한 요리책 전집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요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엄마는 그 요리책들 중에서도 케이크나 서양 요리 편을 종종 보며 별식을 만들다가 실패한 음식을 주곤 했는데, 나도 해보면 재밌을 듯했다. 그러니까 동기는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다’가 아니라 ‘요리를 하면서 간만에 창조적인 활동을 하며 놀아보고 싶다’였다.


그래서 나는 오후 일찍부터 부엌을 온통 엉망으로 만들며 밀가루를 꺼내고 식재료를 찾으며 페이스트리를 굽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했다. 엄마의 도움은 전혀 필요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요리에 너무 어려운 걸 할 수는 없으니, 요리책을 뒤적이며 최대한 쉬워보이고 또 집에 이미 있는 식재료로 만들 수 있는 걸 골랐다.


가만히 요리책을 읽어보니, 기본적으로 페이스트리(크루아상)은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편 다음 버터를 바르고 반 접어서 밀고 또 반 접어서 밀고 해서 수십번 반복하면 되는 거였다. 샌드위치야 뭐, 아주 쉬웠고.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그때 그 요리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당시 나의 회심작은 찾을 수가 없어서 답답한데, 그건 바로 ‘데빌드 에그’였다. 예전에 어떤 소설을 번역하다가 그때 그 음식 이름이 데빌드 에그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 요리책에는 다른 이름으로 수록돼 있었던 것 같다.


달걀을 삶은 후 반으로 갈라서 노른자를 떼어내면 그릇 모양의 흰자가 남는다. 노른자를 부숴서 야채 다진 것과 양념을 섞은 다음 다시 흰자 속을 다시 채워주는 요리였다. 데빌드(deviled)란 노른자의 양념을 맵게 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고춧가루 범벅의 음식들을 먹는 지금의 한국인으로서는 언뜻 이해가 안 가는 수식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계통 없고 맥락 없는 고3의 크리스마스 만찬이 얼기설기 준비되었다. 식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식탁에 모여들어 음식들을 보며 난감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페이스트리와 샌드위치는 그저그랬지만, 데빌드 에그는 다들 맛있고 색다르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엄마는 큰딸의 첫 주방장 데뷔를 몹시 기뻐하며 늘 하는 크리스마스 향나무 장식을 식탁 한 켠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식구들을 위해 내가 요리를 한 적은 없다. 그리고 나는 부모의 집에서 분가를 하던 날, 그때 그 요리책 전집 열 권을 싸가지고 이사를 나왔다. 엄마는 이제 필요없지? 하면서 말이다. 지금도 가지고 있으니, 4반세기도 넘는 책이 되었다. 그런게 그 책뿐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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