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사랑>(2016)
2017.07. 씀
관객은 혹은 우리는 시종일관 본다. 모드의 얼굴을. 그에 드리운 표정을. 움직이는 손과 다리를. 과연 <내 사랑>은 관객으로 하여금 샐리 호킨스가 분한 모드의 얼굴과 몸을 살피게 하는 영화라 할만하다. 물론 에단 호크가 분한 에버렛의 얼굴에 역시 눈길이 머물기도 하지만 그 빈도와 깊이는 모드에 향하는 눈길에 비견되지 못한다. <내 사랑>은 온전히 모드의 영화다.
오프닝부터 그러하다. 카메라는 모드에 밀착한 채 모드를 화면에 넘칠 듯 가득 담기로 작정한다. 모드의 얼굴과 몸은 높은 빈도로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으로 잡힌다. 빛의 양과 시간의 길이를 확보한 채 응시되는 그의 신체에는 발산과 수렴의 에너지가 동시에 생동한다. 시작에서부터 영화를 지배하는 이 정체불명의 에너지는 모드의 신체 그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모드의 신체에 정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완전무결하지 않은 그의 신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의 원천이자 최종 목적지가 되어 관객의 응시를 흡수한다. 에너지의 이동에 매혹된 우리의 시선이 줄곧 모드에 머무는 이유다.
고통과 비가시성으로 점철되었던 모드의 삶이 에버렛과의 동거를 기점으로 자주적인 힘을 획득해 나간다는 점에서, 에버렛은 역할은 분명 결정적이다. 그러나 예의 과정에 그가 꼭 에버렛이어야 했던 필연적인 이유는 결여된다. 마을의 중심인 쇼트라이프 상점에서 모드가 마주한 사람이 그 누구였든, 모드는 구인광고 쪽지를 떼어 그를 찾아갔을 것이기 때문. 다시 말해 둘의 이다지도 운명적인 만남은 ‘어쩌면 우연’이자 ‘어쩌면 의도’다(홍상수의 <오! 수정>(2000) 2장과 4장 제목, 맞다). 모드 스스로가 설정한 인생의 경로에서 그리고 탈출 서사의 일환으로서 일자리는 꼭 필요했지만, 모드가 택한 집이 하필 에버렛의 것이었어야 할 이유는 0에 가깝다. 모드의 삶에서 에버렛이 가지는 절대적 위치는 상실되지만, 그럼에도 모드는 에버렛을 운명의 짝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모드가 꿋꿋이 에버렛의 언어와 손짓, 발걸음을 긍정하는 과정은 그가 여태껏 살아온 삶의 태도를 다시 한 번 연장시키는 절차다. 그는 자신에게 도달했던 고통의 역사, 이를테면 불완전한 육체와 딸과의 이별 등과 같은 마이너스 성질의 것을 자신의 삶 한가운데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존재다. 그래서 모드는 관성에 따라 에버렛의 불친절함 역시 자신이 끌어안아야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과정의 가운데에서 그는 에버렛의 집을 벗어나지 않고, 대신 집 한 켠에 꽃을 그려 넣기로 한다. 하늘을 그려 넣고 파랑새를 그려 넣는다. 처절하게 생존을 위하여만 존재했던 에버렛의 집이 모드의 꽃과 하늘과 파랑새를 입으며 생존 이상의 이미지를 덧입게 되는 것이다. 에버렛의 집에 새로이 내려앉은 에너지는 생존과 횡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생존의 당위를 증명하는 순간의 영원성과 파편의 완결성으로부터 비롯된다. 두말할 것 없이, 모드가 생성하고 구축해낸 것이다.
모드의 사각 프레임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현실은 예술이라 명명될만한 보다 고매한 영역으로 편입된다. 모드가 포착하는 매 순간은 붓질을 통해 박제됨으로써 영원성을 얻고, 모드가 프레임으로 잘라내는 파편은 캔버스에 옮겨짐으로써 완결성을 획득한다. 쇼트라이프 상점에서 에버렛 역시 모드의 시야에 포착되는 순간 이미 그의 삶에 초대된 것이나 다름없다. 모드의 삶에 초청된 에버렛은 그와 함께하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생존의 급급함을 넘어 순간과 파편을 즐길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내 사랑>은 분명 러브스토리지만, 아름다운 두 남녀의 찬란한 데스티니를 그리고 있다기보다는 어쩌다 함께하게 된 두 사람이 묵묵히 동행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묵묵한 동행을 이끄는 것은 순간과 파편을 삶과 예술의 질료로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모드의 에너지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히 자신의 시선과 선택으로 삶을 추동하고 영화를 일구는 모드의 표정과 움직임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된다.
* 내 사랑Maudie (에이슬링 월쉬Aisling Walsh,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