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vitz craftworks
모든 브랜드가 트렌드를 좇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쟁적으로 트렌드를 좇다 보면, 진짜 가치는 잊히고 시장에는 가벼운 레몬만 가득해지겠죠. '가죽공방 헤비츠'는 공예의 원점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헤비츠의 첫 브랜드였습니다. 트렌드를 고민하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먼저 고민했고, 예쁜 디자인보다는 본질과 진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죠. 다가올 10주년을 바라보며 다음 10년을 고민하는 지금, 어쩌면 지나온 길에 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 김준기
* 저는 14년 4월부터 19년 4월까지 헤비츠의 브랜드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이 글은 그동안 해온 작업에 대한 소회 정도 되겠습니다. '언트렌드'는 이런 활동을 더 많이 하고 싶어 시작한 페이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정직한 제작자들의 자존심을 사랑하고 응원하며, 혹 당신이 혼자라서 외롭고 힘들 때 먼저 발견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많은 제안 바랍니다.
유럽의 여느 도시로 여행을 다녀왔다면, 아기자기하고 예쁜 풍경 사이로 좁게 굽이진 도로들에 대해 한 번쯤 불평해 봤을 겁니다. 그들의 길은 똑바르지도 않고, 너무 좁아서 운전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언뜻 보기에도 늘어난 차량을 감당할 수 없어 보이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불편함을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되려 차도를 자꾸 좁히고, 정책적으로 차량 소유에 필요한 비용을 늘려서, 전체 차량 수를 줄이려 하죠. 늘어나는 차에 맞춰 도로를 넓히기만 하는 우리 도시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입니다.
언젠가 이와 관련해서 어떤 전문가의 견해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도로에 차 이외에 다른 것들이 다닌 기억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요. 트집 잡을 여지는 있어도, 분명 대단히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길'이란 본질적으로 사람 간의 왕래에 의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車馬의 오고 감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 간의 소통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도로는 기본적으로 단절을 전제하고 설계됩니다. 오직 차량의 통행이라는 명제만 있기 때문에, 도시 생활자들은 자동차라는 상자 속에 몸을 구겨 넣지 않고는 이동할 수 없죠. (덕분에 서울은 대중교통이 가장 잘 발달된 대도시 중 하나로 발전했지만, 주제에서 벗어나니 넘어가겠습니다)
이런 차이점이 왜 생겼는지 고민하며 과거를 더듬어 따라가다 보면, 문득 어떤 변곡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한말, 그러니까 우리 역사에 단절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 도로에도 다양성이 있었거든요. 보행자와 수레, 자전거, 말과 마차, 우마차, 소수의 자동차가 오고 가던 기억이 이 땅에 아주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 지금의 매끈하게 쭉 뻗은 포장도로만 남았죠. 만약 우리 도시가 유럽처럼 단절 없이 자연스럽게 성장해 왔다면, 만약 우리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조금 더 존중하며 살아왔다면, 오랜 기간 도성이었던 서울의 길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대전에 비견되는 심각한 내전을 겪고, 세상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로 전락했던 그 아픈 기억이 단절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병적으로 낡은 것을 부수고 버렸습니다. 그 자리에 끊임없이 새것을 채우며 게걸스럽게 성장했죠. 원래 도시는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도시는 선을 긋고 그곳의 삶을 깨끗하게 지운 뒤 다시 만든 공간입니다. 때마다 누군가의 계획대로 설계하여,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끼워 맞췄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도시들의 구도심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반면, 우리의 옛 길은 모두 사라지고, 옛 건축물은 보호구역이라는 우리에 갇혀 전시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렇게 맥락이 부자연스러운 부분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야에서 말이에요. 비단 도시나 기술, 생활양식뿐 아니라 문화의 양태, 사회 분위기,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에 이르기까지, 이 역사적 비극과 그로 인한 강박적 태도는 물심양면으로 엄청난 단절을 만들었습니다. 그 단절 부위를 가만히 어루만지다 보면, 우리는 사실 반만년 역사를 가진 민족이 아니라, 100년이 채 안 된 신생국가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에요.
우리의 각박한 현재 삶들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이른바 사회 구조적 문제들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비슷한 문제의식에 닿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직적인 의사결정 구조와 공동체를 우선하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 아무런 비판과 담론 없이 자유주의와 자본 경제 만을 의심할 나위 없는 진리로 여기게 된 편협함,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약간의 불합리와 불의를 눈 감으며, 때로 자존심을 적당히 희석하고 타협하며 살아온 태도까지, 전부 가난을 극복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세계적으로 연구 대상이었던 한국의 비틀린 산업구조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재벌의 파괴적 행태와 건강하지 못한 중소기업 생태에 대해 지적해 왔지만, 어느 누구도 손쓸 방법을 낸 적도 없고, 해결하려 노력한 적도 없습니다. 다분히 시혜적이고 온정적인 보호정책들을 볼 때면, 정말 저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운 건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산업구조에 빠진 것이 있는데,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 산업에도 맥락이 있습니다. 산업혁명과 같은 거대한 특이점조차, 오랜 제조업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현상이자 결과입니다. 기관과 기계의 생산성 혁신은, 공방이라는 시스템이 전제될 때 비로소 현대적 의미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산업화의 핵심인 공장의 성장 역시 도시화나 경제 규모와 함께 이야기해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어느 하나만 강조하다 보면, 그로 인한 결핍과 단절이 항상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가죽공방 헤비츠의 맥락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헤비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에 운영된 도제식 공방들과, 산업혁명기에 찾아온 공예의 변화를 충분히 살펴, 오늘날 우리 산업의 미싱 링크를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브랜드를 시작했습니다.
미술사 교수인 하워드 리사티는 <공예란 무엇인가(A Theory of Craft: Function and Aesthetic Expression)>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공예 혹은 ‘장식미술’을 열등하거나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철학교수인 래리 샤이너 역시 <순수예술의 발명(The Invention of Art)>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집니다. “의술과 군사 전략에서부터 도자기 만들기와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에 종사했던 고대인들은 현대적 의미의 ‘장인’도 ‘예술가’도 아니었다. 기술과 요령을 겸비한 장인이자 예술가 둘 다였다."
두 사람은 사실 공예와 예술의 구분에 있어 대립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문제의식은 동일하죠. 전통적으로 공예는 '실용적인 물건에 장식적 가치를 부여한 것'으로 정의되어 왔습니다. 이미 이 짧은 정의에도 우리가 공예를 바라보는 모순적 시각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공예품은 실용성을 갖추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각자 생각하는 실용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는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공예의 스펙트럼은 예술품이나 예술적인 빈티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생산품에까지 확장됩니다.
사실 예술은 공예와 계속해서 선을 그어 왔습니다. 아니, 그렇게 구분 지음으로써 예술은 태어났죠. 물론 예술은 당대 인문의 결정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기록되는 것은 그뿐입니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공예와 예술을 구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주류 정치사 외에 생활사 같은 미시사의 복원이 의미가 있듯, 예술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온전히 공예에 주목하려는 태도도 필요할 것입니다. 실제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혁명의 원동력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생산성이며, 어쩌면 기록되지 못했다는 것 말고는 공예가 예술보다 못할 이유가 전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15세기 전후 나타났던 르네상스 운동을 해석하는 몇 가지 시각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많은 예술가들이 공방에 견습생을 두고 작품을 '생산'했거든요. 르네상스는 그동안 종교에 억압되었던 예술적 욕구의 분출이란 면에서 특징적으로 평가받는 사건이지만, 한편으로는 공예의 본질에 대해서도 많은 힌트를 던져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축적된 자본, 자유와 관용으로 충만한 도시,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자유인들이 함께 만들어낸 공/예 혁명이었죠. 다음에 올 사건과의 구분을 위해 이것을 대충, '생산이 예술에 종속된 사건'이라고 명명해 봅시다.
산업혁명의 맥락은 좀 더 흥미롭습니다. 원래 제조업이라는 단어는 손(manus)과 만들다(facio)의 결합입니다. 사람이 직접 손과 도구를 이용해 뭔가를 만들어 내는 모든 행위가 제조manufacture입니다. 오랜 기간 제조업에서의 생산성 향상이란, 그저 손을 여럿으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공예가 여러 명이 한 지붕 아래 거하면, 곧 공방이 되는 것이죠. 르네상스의 도제식 공방을 제조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이것은 일종의 분업 혁명입니다. 같은 숫자의 공예가가 있는 공방과 비교할 때, 생산성은 더욱 향상되고 제작품질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통제되기 시작하니까요.
18세기가 되면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산업혁명을 촉발한 에너지 혁명이 그것이죠. 그동안 기계를 움직이던 동력은 인력이나 자연력 등 또 다른 물리력에 불과했으나, '기관'의 발명으로 화학적 반응력을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됩니다. 화학 에너지는 즉각적이고 연속적이며, 미세하게 조정이 가능하고, 연료를 공급하는 한 꾸준합니다. 기계가 스스로 움직이면서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늘자, 사람들은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에 부딪힙니다. 이제 생산과 소비의 경제학이 본격적으로 레일을 달리고, 생산성이 모든 것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생산성의 변화는 여러모로 굉장한 충격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마르크스 같은 영리한 철학가조차 생산성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으니까요. 당연히 이 변화는 제조업 전체에 충격을 주었고, 공예의 의미도 흔들었습니다. 이 즈음 발화한 모더니즘 예술 사조의 기반을 전부 생산성에 의한 변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일부 공예가들은 이 생산성의 증대를 기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세계적인 본차이나 브랜드, 영국의 포트메리온을 한 번 살펴봅시다. 예쁜 손그림이 그려진 포트메리온의 식기들은 보기에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실제 사용하는 데도 무리가 없습니다. 고급 선물로 애용되던 포트메리온은 어느새 신혼부부 필수품 정도가 되었죠. 원래는 중국의 고가 도자기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된 영국의 본차이나는, 대량생산 덕분에 지금처럼 대중적인 공예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족이지만, 골회자기는 흙에 골회분을 섞어 만드는 것으로, 이 또한 가죽과 함께 일정 부분 축산업의 업사이클링을 책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트메리온 브랜드를 처음 시작한 수잔 윌리엄스-엘리스 여사는 원래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였습니다. 예술대학에서 그림과 조각을 배웠죠. 한편 그의 아버지 클라프 윌리엄스-엘리스 경은 집념의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포르토피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웨일스의 대서양 바다에 영국식 포르토피노를 건설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게 건설된 아버지의 포트메리온 빌리지를 관리하면서, 수잔은 도자기에 직접 그림을 그려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1960년대의 일입니다.
클라프 경은 여러모로 현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good design is good business"라는 원칙을 수잔에게 가르친 사람이죠. 실제로 수잔이 만든 기념품이 포트메리온 빌리지에서 잘 팔리자, 마침 멀지 않은 도시 스토크 온 트렌트에 망한 도기 공방 두 개를 인수하여, 수잔에게 도자기 제조사업을 맡깁니다. 수잔이 성공한 디자이너이자 기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의 앞선 생각과 영향력이 있었던 셈입니다.
수잔 또한 아버지의 원칙을 발전시킬 그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0년 탄생한 포트메리온의 시그니처, 보타닉 가든 시리즈는 하나의 컬렉션에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당시 플레이팅 문화에 대한 도전과도 같았습니다. 똑같은 디자인의 컬렉션에 같은 그림이 있어야 한다는 오랜 도예가들의 관념을 반박하는 것이었죠. 다만 그의 아이디어가 정말로 힘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려면, 생산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습니다. 곧 수잔은 자신의 그림을 전사, 즉 프린트하기로 결심합니다.
지금도 공예의 예술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손으로 직접 만든 정성, 손으로 한 것 같지 않은 정확함과,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희소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어느 누구도 디자이너이자 공예가로서 수잔 여사의 예술적 자부심이 모자라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가 2005년 런던 예술대학에서 명예 연구원직에 위촉되며 했던 인터뷰에는, 그의 공예와 예술에 대한 견해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I decided to pursue pottery, rather than painting, mainly because I wanted to create affordable and beautiful things. I wanted people to buy my work purely because they liked it, and that it had a function, rather than buying things just as an investment... (후략)"
공예와 예술의 논쟁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딱히 이론이나 담론도 없고요. 종종 의견 충돌이 생기면, 서로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갈 뿐이죠. 얼마 전 잠시 세간을 떠들썩했던 조영남 씨의 대작 논란은, 이 문제가 생각보다 작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대중이 현대미술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해프닝'이라며 훈계를 하기도 했고, 일부 기사에서는 조영남 씨 개인에 대한 짙은 폄훼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박홍순 씨의 글 '화투 그림과 도박 공화국(<미술관 옆 인문학, 2011>)'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공예와 예술의 오랜 발전을 보고 있노라면, 다들 미적 가치나 제품의 실용성, 혹은 작가의 생각과 욕망만 이야기할 뿐, 아무도 그로 인해 변화하는 사람들의 삶과 감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공예와 예술에만 집중하다, 주객이 전도된 건 아닐까요. 사실 공예나 제조, 아니,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우리 모두가 하는 '일'입니다. 일은 개인적으로나 사회, 역사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갖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과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한 겁니다. 이른바 '워라밸'이나 '킨포크', '로하스' 같은 건 그런 의문에서 시작된 관념들이겠죠.
가죽공방 헤비츠는 그런 고민들이 막 사회적으로 발화될 즈음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헤비츠케이스'였어요. 세상의 모든 케이스를 만든다거나, 차가운 현대 제조품과 사람 사이의 접점 역할을 하는 목표를 담은 사명이었죠. 그런데 문득, 공예 역시 누군가의 삶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시작됩니다. 공예품의 생산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그 제품을 만든 의도가 더욱 중요해지는 거죠. 만든 이의 삶과 만들기까지의 생각, 그것을 담은 브랜드의 가치관 등이 콘텐츠 커머스 형식을 통해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공예품은 단순한 제작품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실은 글처럼 간단하진 않습니다. 공예가 생산성을 증대하려고 욕심을 부리면, 점점 만드는 사람의 삶이 영향을 받습니다. 사업이 커지고 나니, 그동안 비판하던 대기업의 행태에 수긍하게 된다고 서슴 없이 말하는 공예가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산성을 포기하고 예술적인 욕망에 집중하면 스스로 오만해지기 십상입니다. 가격이 올라가 판매량이 줄고 제품의 영향력은 줄어드는 반면, 제작자의 생활은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시작되죠. 이 시소게임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정 부분 타협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어느 한 지점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미싱 링크가 문제가 되는 순간은, 이런 선택의 순간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모여서 도란도란 뭔가를 만드는 이런저런 공방이 많아야 제조업 전체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다양한 철학과 가치관을 실물 경제에 반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생각들이 정당의 다양성을 통해 반영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하나의 이슈를 특정 시점에 모든 당이 공유하고, 한 산업을 일부 대기업이 독점합니다.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고, 실물 경제에 반영되지 못한 수많은 개인은 파편화되고, 외롭고 힘든 혼자만의 싸움터로 밀려나죠.
자기만의 시간에 빠져 있는 예술가들에게 핀잔을 주거나, 확장에 몰두하는 대기업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예술가들의 작업물은 그 자체로도 경탄할만하고, 언제나 불멸의 의미로 남을 겁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상을 받았죠. 대기업의 생산품은 우리 삶을 지탱합니다. 그들의 끝없는 경쟁과 연구는 이제 인류 진보의 한 축입니다. 물론, 그들도 이미 그들의 상을 받았죠. 그런데 보통의 우리는 예술적이지도 않고,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자본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통의 삶은 의미가 없나요? 우리도 목소리를 조금 높여서,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가 오지 않았나요?
현대의 공방은 다른 어떤 기업형태보다 훨씬 친인간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집니다. 우선 생산성 측면에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계와 공구가 충분히 발전했고, 또 저렴해졌으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도시와 산업 클러스터가 존재합니다. '보통사람'들이 모이는 이상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도제식 시스템은 갖춰야 할 테지만, 잘 설계된 분업 시스템과 외주 협력을 더하면, 작은 공방이나 하물며 개인 디자이너라도 원하는 만큼 생산력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인터넷 덕분에 판매도 쉬워졌습니다. 예전처럼 유통 벤더나 마케팅 플랫폼을 이용하지 않고도, 제작자가 직접 판매할 수 있습니다. 유통 단계를 덜어내면, 소량 생산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죠. 대량 생산으로 낮아지는 단가보다 유통 단계 하나를 줄이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큽니다. 이렇게 제작 브랜드가 직접 온라인으로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미디어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이, 이 이야기의 발화점입니다. 개인 미디어가 직접 제품을 소개하는 온라인은 단순한 판매 시장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이야기와 이미지, 가치관의 각축전이죠.
이제 중요한 건, "나는 누구이고,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입니다. 정체성을 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길고 지루하지만, 사실 누구나 살면서 스스로 또 본능적으로 해 왔던 작업이어서, 실제로는 그리 어렵지 않기도 합니다. 나만의 룰을 만들고, 남들과 다른 나만의 이야기를 찾아 신중하게 가다듬다 보면, 이 과정에서 고민과 생각이 모여 몇 개의 담론을 이루는데, 이를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면 가치관이 됩니다. 이 가치관을 사업의 모든 부분에 꾸준히 투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브랜드라는 인격체가 형성되죠.
헤비츠가 처음부터 브랜딩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갖춘 채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산업적 맥락을 이해하고 포지셔닝했습니다.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열망 위에, '공예 역시 누군가의 삶'이라는 단순한 문제의식, '내가 쓰고 싶은 제품'이라는 방향성 등, 비교적 명확한 몇 가지 가치를 머리에 새기고 시작했어요. 이렇게 또렷한 가치관은 사업이 직선 주로를 달릴 때 가속페달이 되고, 급격한 코너를 만나면 브레이크가 되어줍니다. 변곡점을 만날 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되기도 하고요.
브랜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신중하게 통합하여 실제 인격을 부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공예품의 의미를 스스로 기록했고, 실제 생각과 감상을 발전시켰으며, 이를 다시 자기다움을 규정짓는 도구로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어 헤비츠의 브랜드 정책은,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마케팅 방법론을 생각하면 꽤 솔직하고, 불친절하며, 도전적입니다. 꼭 손바느질을 해야만 하는 부분이 아니라면 대부분 기계 미싱을 돌려 박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장인의 한 땀 한 땀' 같은 이야기는 하지도 않죠. 통가죽을 두껍게 쓰다 보니 디자인이 투박합니다. 바늘이 가죽을 제대로 뚫지 못해서 뒷면의 땀이 삐뚤빼뚤할 때도 많습니다. 심지어 가죽에 흠집이나 얼룩이 있는 채로 제품이 나가는데도,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니 그냥 쓰라고 말합니다. 디자인은 단순하다 못해 투박해 보이고, 제품에는 아무런 마감도 없습니다.
이런 모든 디자인은 신중하게 의도된 것이고, 브랜드의 가치관이 분명하게 반영된 결과입니다. 고객들이 이런 독특함에 의아해하며 그 이유를 물어올 때, 헤비츠는 하나씩 차근차근 답을 했습니다. 베지터블 가죽의 의미부터 시작하여, 풀그레인 가죽의 자연스러움과 에이징 파티나의 아름다움에 대해 한결같은 논조로 이야기했고, 공예의 목적과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디자인을 납득시켰습니다. 브랜드의 논리에 반하는 요소들은 비록 매출이 걸린 문제라도 과감히 제외했죠. 이런 행동은 기존의 마케팅 어법에는 잘 맞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스스로 기록의 엄중함을 아끼고 보호했기 때문에, 자기모순 없이 납득할만한 정체성이 형성되었습니다.
몇 년 동안 기록이 쌓이자, 결과적으로는 브랜드 자체가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로서 인지되기 시작합니다. 남들과 조금 다르게 보이는 이들의 제품, 헤비츠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설득력은 결국 '헤비츠다움'에서 옵니다. 헤비츠는 자신의 행동과 그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원재료의 선택부터 생산 방식, 제품의 디자인과 사용 목적까지, 모든 과정에 대해 이유를 가지고 있죠. 이렇게 한 명의 인격체로서 주장하고, 태도를 보이도록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헤비츠와 친해지고,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는 헤비츠의 꿈에 공감합니다.
그러니까 브랜드란, '좋은 소재로 합리적인 제품을 만든다'와 같은 멋진 말과 목표가 아니라, 고민하고 선택하며 성장하는 실존적 존재입니다. 이 존재는 그저 상상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행동하고 느끼고 살아가야 합니다. 헤비츠는 제품에 자신만의 이야기와 성격을 담고, 제품 구매 행위를 가치의 선택으로 보이도록 했습니다. 각박하고 일방적이었던 상거래를 관계 맺기로 변화시켰고, 고객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한 것이죠.
따지고 보면 큰 차이 없을, 수많은 가죽공방이 있었습니다. 디자인 품질이나 소재, 가격 같은 필수요소는 거의 비슷했죠. 그 틈바구니에서 유독 헤비츠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건 오직 이야기 덕분이었을 겁니다. 혼자 최고라며 남들을 밟고 일어선 것이 아니라, 꾸준히 나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지만, 기록은 어지간한 용기로는 안됩니다. 가치관은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고, 끝없는 자기 부정과 혁신의 경험을 한데 모아 비로소 자존심이라는 진주로 만들어집니다. 모조품이 그 아름다움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시간이 겹겹이 쌓인 진주를 잉태하는 그 노력과 성실함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죠.
헤비츠는 물건의 존재 목적을 상기시키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경험해 볼 수 있도록 돕고, 제품이 일상의 빈티지로 재탄생하는 과정 자체를 선사합니다. 그 가운데 여러분이 잠시나마 소유와 사용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받을 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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