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단 사원 나부랭이에게 중요한 건 국적이 아니다
나는 4대 보험 등록이 적용되어 일했던 직장으로서 총 3개의 회사에 재직했다. 첫번째 직장은 국내 법인 설립이 20년이 넘은 독일계 회사, 두번째는 국내 중소기업. 세번째는 현재 재직중인 국내 진출이 얼마 되지 않은 미국계 회사다. 상당히 양극화가 심한 조건의 환경에서 다양한 직장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엄청나게 중요한 요직이었던 적은 전혀 없고 말단 사원 또는 기껏해야 대리, 과장 수준 정도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내용은 신입사원, 말단 사원이 체감하는 외국계 회사가 국내 기업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모든 특징을 다 늘어놓으려면 어디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으니, 간단하게 몇 가지 내용에 대하여 공유해보려고 한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 내용은 어디까지나 말단 사원 급에서 체감할 내용임을 강조한다.
1. 급여와 연봉 수준
산업군과 보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국적에 관계 없이 그 기업의 사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 급여가 높고 그 외에는 평범하다. 또한 동일한 직급 선상인데도 차이가 심해서 서로 연봉을 공개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실제로 사석에서 내 동료의 급여를 우연한 기회에 추측해볼 수 있는 단서가 제공되었는데, 나보다 꽤 높아서 내심 상처받았던 기억이 있다.(심지어 나랑 같은 일을 하는데!)
그리고 국내 대기업에 비해서 어쩐지 아쉽다. 네임밸류에 비하여 뭐가 쪼오금, 아니 사실 아주 많이 아쉬운 느낌이 있다. 뭔가 이 정도 위치의 외국계 기업이면 적어도 이거보다는 더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싶다. 그래서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 할 때 나의 급여에 대하여 항상 과대평가 받는데, 솔직하게 고백하자니 회사와 나의 명예가 같이 실추되는 느낌이 들어 입을 열기가 무겁다. 그래서 늘 뭔가 있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겸손한 제스처로 웃어 넘긴다. 그러니 애시당초 친구들한테 고백해라. 나 생각보다 쪼들리니까 자꾸 쏘라고 하지 말라고.
다음은 보너스 및 상여금인데, 이건 국내에 들어온지 얼마나 오래된 기업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오래된 외국계 기업의 조직구조는 경영진은 외국인이 많지만 실무진은 국내파가 다수를 이루는, 다시말해 로컬라이징이 끝난 기업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 이 전형적인 조직구조에서 오는 많은 상황이 있지만, 보너스와 상여금 측면에서만 보자면 국내 기업과 비슷하게 주로 현물과 현금 위주의 보너스를 지급한다. 확실한 단기 금융치료 효과를 받을 수 있다. 죽겠다 죽겠다 싶다가도 의외의 한방에 수 개월의 생명연장 효과가 있다. 반면에 국내 진출이 얼마 되지 않은 기업은 휴가나 스톡옵션, 동료들의 격한 박수 및 격려의 말 등 주로 멘탈케어(?) 측면의 보너스를 지급한다. 뭔가 기쁘고 보람차긴 한데 굉장히 아쉽다. 장기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느낌이 있긴 한데..당신이 회사에 대한 깊은 애사심과 자부심이 동반되지 않으면 받고도 기분이 썩 개운치 않을 것이다.(주고도 욕먹는다는게 이런건가)
2. 복지
"외국계 회사는 복지가 좋잖아?"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이게 애매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 면이 또 있다. 일단 외국계 기업은 '직원 개인에 대한 다양한 지원'에 많이 집중하는 면이 있어서, 자기개발과 정신적, 육체적 건강, 여가생활 지원 쪽으로 다양한 제도가 있다. 그래서 국내 기업과 비교하면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된다. 반면에 국내 기업은 '직원의 가족 전체에 해당하는 혜택 및 실질적인 지원'쪽에 복지가 맞춰져 있는 느낌이다. 이건 확실히 기업의 국적에 따라 큰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홀몸이라면 외국계 기업의 복지가 나름 만족스러울 것이고, 나이가 조금 있고 책임질 식구가 있다면 아쉬운 마음이 들 수 있다.
3. 사내 문화
물론 케바케가 있지만 대체로 당신이 회사에서 철저한 공적인 친분관계만을 원하고, 나의 사적인 영역을 지키길 원한다면 환영한다. 여기가 당신이 있을 곳이다. 사적인 친분을 아예 배제한 상태에서 회사 생활을 할 수도 있을 정도로 개인적 성향이 강하다(물론 그렇게 지내면 일과 회사생활이 큰 재미는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항상 수평적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주장을 스스럼 없이 표현할 수 있다. 회식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참여는 자유다. 상사와도 별 눈치 없이 사적인 대화도 가능하고 농담 따먹기가 가능한 분위기를 이룬다. 그러나 앞에 조건을 잊으면 안된다. 케바케다. 조직의 경영진의 성향이 우리가 남이가 스타일이면..(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4. 업무 방식 및 인사 평가
대체로 업무 영역이 정해져 있는데, 개인의 역할과 팀의 역할로 이루어져 있다. 당신의 역할은 당신만이 할 수 있게 프로그램 되어 있다. 당신이 어떤 이유에서든, 예를 들면 아프다거나 또는 모종의 사정 때문에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그 업무는 그냥 빵꾸...아니 미완의 상태로 남아버린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체 업무 흐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아니 그럼 내가 왜 일하는건데). 그렇다. 당신은 그정도의 존재인거다. 걱정마라. 회사는 돌아간다. 팀의 역할은 내가 안하면 누군가 한다. 또는 아무도 안한다. 근데도 회사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대체로 외국계 글로벌 기업은 나사 몇 개가 빠져도 적당히 돌아가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근데 어떤 뛰어난 누군가가 늦게나마 결국 하기는 한다. 나는 그게 당신이면 좋겠다.
근데 문제는 인사평가에 있다. 당신이 승진 또는 급여 인상의 욕구가 크다면 어떻게든 일도 잘하고 자기개발에도 최대한 여력을 투자해야 한다. 개인의 KPI를 달성하지 못하면 미래가 크게 밝지는...아니 적당히 밝기만 할 것이다. 왜냐면 크게 잘릴 일은 없다(말단 사원이기때문에). 외국계 기업은 보통 Promotion(승진)보다는 Role Change(보직 변경)의 경향이 강하다. 뭔 차이가 있는지 짧게 말하자면, 당신은 현재 업무에 적합하기 때문에 채용이 된 것이다. 그 업무를 짱짱 잘하면 회사가 "좋았어 역시 우리가 사람을 잘 뽑았어" 정도의 인정은 있으나, "저사람 저 일 잘하니까 승진 시켜야겠는데?" 까지는 의식의 흐름이 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소위 말하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완벽히 수행하는 스타일'은 외국계 기업에서 빛을 보기 힘들다. 오히려 '저 ㅅㄲ 왜 저렇게 나대지' 직전 수준까지 자기 어필과 존재감을 보이는 타입이 오히려 승승장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용한 I타입이 그냥 외국계 기업에서 남들의 발판이 되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자타공인의 I타입이지만 다행히 아직 잘 살아남고 있다. 얌전한 사람은 얌전한 사람 나름의 생존방식이 있는 법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5. 워라밸
이건 편견일 수도 있지만, 세간에 알려진대로 미국계 회사는 은근히 워라밸이 좋지 않다.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업무를 수행한다'라는 대전제를 깔아야 하는데,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주어진 업무가 꼭 그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경우 회사는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결해. 네가 잘해서 빨리 끝내면 놀 수 있어. 좋지?' 이런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역량과 워라밸은 비례한다.
다른 측면에서 한번 더 이야기해보자.
혹시 당신이 인생 즐기는 YOLO족이면 워라밸이 꽤 좋을 수도 있다. 근데 미래가 많이 밝지 않...흠흠.
누구나 아는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처럼, 인간은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나 명예욕 등 갖가지 욕구들이 있다. 이 욕구들에서 해탈한 자가 아니라면 지금보다 나아지고 싶을 것이다. 그러려면 남들과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당신이 초천재가 아니라면 결국 자기 능력이나 업무 달성 등에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데, 그러면 워라밸이 자연스레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완벽한 워라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워라밸이 좋다는 뜻은 라이프 쪽이 높은 경우를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인간의 욕심이 존재하는 한 그게 쉽지 않다. 욕심이 없고 현재에 만족한다고?
환영한다.
5. 결론
외국계 기업에 대하여 종합 평가를 해보자면, 국내 기업과 차이가 좀 있을 뿐, 장단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외국물을 몇 년밖에 먹지 않은 토종 한국인이기 때문에 처음 외국계 회사에 왔을 때 신기하기도 하고 생소한 부분들이 많았다. 내가 어른들에게 들었던 회사의 문화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모여 사는 조직이 다들 그렇듯이 어느 곳이든 구성원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존재하고, 당신의 가치관에 따라 외국계 기업의 문화는 너무나도 좋을수도, 도저히 이해가 안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는 단언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에 있어 필요 조건은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 (충분 조건은 아닐 수도)
어쩌다보니 내용이 뭔가 내가 재직 또는 재직중인 회사들 흉을 본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우리 회사를 존중하고, 팀원들도 사랑하고 소중하고...얼른 끝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