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과 현실 사이 그 어딘가
나는 이 여행에 대한 세세한 계획은 없었다. 지금은 대륙횡단이나 세계일주 경험자들이 많아서 인터넷의 SNS, 영상들을 통하여 그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여행을 떠났던 2015년에는 국내에 육로를 통한 세계일주에 대한 별다른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이륜차 타고 세계여행'이나, 'Unlimited Horizon'같은 국내외의 인터넷 커뮤니티, 또는 몇몇 유경험자들의 서적 자료들에 의존하여 굉장히 대략적이고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계획만 세웠다. 게다가 평소에 별다른 계획 없이 큰 목적지만 정해놓고 발 닿는 곳으로 여행을 가는 나에게 세세한 계획은 별 소용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3개월을 고민한 나의 여행루트는 이러했다.
러시아 -> 몽골 -> 중앙아시아 -> 유럽 -> 여유가 남았다면 미국
이따위 루트를 계획이라고... 지금 보니 기가 막힌다.
자연스럽게 여행은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르게 흘러갔다.(생각한 게 없었기 때문에)
계획은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자연을 벗 삼아 시베리아 평원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오토바이가 나인가, 내가 오토바이인가 하는 일체감을 느끼면서 이것이 바로 장자의 물아일체인가 어쩌고 하면서 온갖 궁상은 다 떨면서 갈 줄 알았는데, 러시아 행 페리를 타기 위해 도착한 동해항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4대의 바이크가 있었다.
대전, 김해, 서울, 대구, 캐나다. 모두 초면인 사람들의 출발지는 모두 달랐지만 목적은 전부 바이크 세계일주였다. 이럴 수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뭔가 희소성을 살짝 잃었다는 아쉬움과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동시에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아성찰을 위한 고독한 여행길이 갑자기 신나는 그룹 여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곧바로 수속을 마치고 페리에 올랐다. 페리 여행사의 배려로 모두가 같은 방에 배정받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모두 각자의 여행루트가 있어 끝까지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처음 2주 정도는 방향이 같아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관심사가 같은 것만큼 빠르게 친해지는 방법이 없는 법이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었다. 예상과는 매우 다른 전개였지만, 이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해 항에서 출발한 페리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도착하는 데는 만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고, 항구 세관에서 통관이 완료되어 바이크를 다시 받아보기까지 3일이 걸렸다. 그 사이에 일행과 블라디보스톡 이곳저곳을 다니며 구경했다. 러시아 심카드도 구매하고, 도심 구경도 즐겼다. 전체적으로 조용한 도시였다. 관광도시는 아닌 탓에 인프라 형성은 딱히 되어있지 않았다. 상점의 간판이나 음식점 메뉴에서도 영어를 많이 찾아볼 수 없었다. 러시아의 키릴 문자는 영어의 알파벳과 비슷한 형태가 많은데, 발음도, 뜻도 달랐다. 러시아가 초행인 나로서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마저도 재미있었다. 당연하게도.
블라디보스톡에서 당초의 목적의식을 망각하고 놀고먹은 지 3일째, 드디어 통관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유리'라는 이름의 건장한 체격의 남자 직원(...)의 안내로 다시 바이크와 감동의 상봉을 할 수 있었다. 바이크를 수령받아 다시 시동을 걸고 숙소로 돌아오니 또 마음이 새로워졌다. 이제 관광객 노릇도 여기까지다. 지금부터는 '바이크 여행자'로 돌아갈 차례다!
사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무척 집에 가고 싶어 졌다. 그 왜 있잖은가. 소풍 전 날 갑자기 가기 싫어지는 거.
출발 전 다졌던 비장한 각오도 3일 간 놀고먹으면서 살짝 무뎌져 버렸다. 으어 가기 싫다. 아 엄마 보고싶...
이제는 진짜 길을 떠날 차례였다.
로망과 현실 사이 그 어딘가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처음으로 마주한 시베리아는 처음 보는 세상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 드넓은 평야와 곧게 뻗은 아스팔트 길, 포토샵으로 보정한 듯한 구름이 떠다니는 파란 하늘. 정말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상쾌한 기분에 벅차오르며 나도 모르게 스로틀을 감으며 속력을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멋진 곳이 나오면 잠시 길가에 세우고 사진도 찍고, 옹기종기 앉아 쉬기도 했다. 그래, 이 느낌이다. 이런 해방감과 고양감을 느끼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태어나길 잘했어!
그러나 이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리 햄버거를 좋아해도 일주일 내내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고, 롤러코스터를 좋아한다고 해도 몇 시간이고 계속 탈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아름답고 찬란한 풍경을 계속, 끊임없이, 하루 종일, 매일매일 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새삼 여기가 우리나라가 아님을 다시 실감했다. 한국은 지형의 크기도 작지만 산지 지형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고속도로가 아니면 곧게 뻗은 길이 별로 없는데, 러시아는 정말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도 커브 길 하나 나오지 않았다. 정오가 될 즈음에는 이미 풍경이 눈에 크게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체력은 빠르게 방전되었다. 난생처음 외국에서 바이크를 주행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날씨였다.
사방이 탁 트인 시베리아 평원에서는 항상 거센 바람이 나를 이쪽저쪽에서 공격했고, 누군가가 조종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구름이 나를 계속 쫓아왔다. 오전 내내 몰아치는 바람에 시달렸는데, 오후부터는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강풍에 몸을 실은 빗방울이 사방으로 날아들었고, 해가 질 때까지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고통의 연속
내가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나온 바이크의 정식 명칭은 Honda CRF250L 이라는 바이크로, 외형부터 보면 느껴지겠만 원래 이런 장거리 투어를 위한 바이크가 아니다. 수많은 바이크 종류 중에 듀얼 퍼포즈(Dual Purpose)라는 장르에 속한 머신으로, 원래 50:50의 비율로 포장도로 :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전천후 만능 올라운드 플레이어... 가 아니고, 쉽게 말해 긴 시간 동안 타고 다닐만한 구조가 아니다. 개인적인 취향과 사막 횡단에 대한 로망이 맞물려 선택한 녀석이었다. 덕분에 치명적인 약점이 몇 가지가 있으니 그중 하나는 안장이다. 안장의 폭이 좁고 매우 딱딱하다. 비포장도로를 다니려면 바이크가 이리저리 흔들리니 두 다리로 단단하게 고정해야 하니 당연한 구조였으나, 이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일으켰다.
엉덩이가 정말 굉장히, 매우, 몹시도 아팠다.
양 옆으로 좁은 안장은 내 골반을 정확히 짓누르고 있고, 딱딱한 재질은 내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압살 했다. 여행 첫날부터 엉덩이가 많이 뻐근했다. 오래 앉아있으니 당연한 증상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갔는데 이 고통이 가면 갈수록 증가했다. 처음에는 엉덩이 근육이 뭉친 듯이 아팠는데 가면 갈수록 고통이 스며들어 뼛속까지 아려왔다. 여행 초기 1~2주 동안에는 똥 마려운 사람처럼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달렸고, 결국 한 시간 운행하면 30분 정도를 선 채로 달려야 했다. 여행 전 바이크를 튜닝할 때 젤 시트라는 말랑말랑한 안장이 눈에 들어왔는데, 17만 원이나 하는 가격에 실소하며 장바구니 리스트에서 제외했는데,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장바구니 삭제 버튼을 클릭하는 어리석은 내 손가락을 부러트리며 멱살을 흔들고 싶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던 엉덩이도 2주쯤 지나니 별 느낌이 없었고, 여행 1개월 차 즈음에는 12시간 내내 앉아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렇게 내 엉덩이는 강철 같은 엉덩이가 되어갔다.
음... 결과적으로는 좋은 건가?
그렇게 고난과 역경을 마주했던 이 날의 진행 거리는 약 300Km. 첫 번째 목적지인 하바롭스크는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 약 770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 절반 즈음에 있는 키로브스키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겨우 찾은 숙소에서 짐을 풀고 허물어지듯이 침대에 몸을 눕혔다. 엉덩이는 여전히 얼얼해서 의자에 앉기도 힘들었고, 종일 같은 자세를 유지한 탓에 허리랑 손 마디마디가 쑤셨다. 다른 사람들을 보아하니 나랑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다. 이 정도 역경쯤은 있어야 바이크로 세계일주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지 않겠어? 어차피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엉덩이처럼)
마음을 다잡으며 조용히 전의를 불태우며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살짝, 아주 잠시 내일 일어나면 그냥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정말 세계일주를 시작한 첫 번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