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1과 레비나스
내가 좋아하는 한 영화 평론가가 대중강연에서 즐겨 쓰는 단어가 한 가지 있다. ‘썸씽’이란 말인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작게 움찔한다. 영화란—적어도 그(평론가)와 내가 만나는 계기에 한에서는—함께 보는 것이기에, 그의 강연은 대부분 관객과 그가 조금 전 동시에 관람하고 온 어떤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따라서 그 강의들은 평론가를 포함한 관객 집단을 동시대적 공동체로 규정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때 지난 소설이나 부모님 뻘의 중년 글쟁이들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었던 ‘썸씽’이라는 표현은 내가 그 말의 의미로 직행할 수 없도록, 의미보다는 그 낯선 발음 자체에 잠시 코마 상태로 붙들려 있도록 만들었다. 지극히 사소한 경험 그리고 그만큼의 주관적 해석이지만, ‘썸씽’이라는 말은 우리 세대의 것이 아니었다. 말에도 세대가 있다는 것은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부터 잘 보여주고 있다. ‘멋지다’라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맥루한의 세대는 ‘Hot’을 사용했지만, 그 표현이 구태의연해지면서 그 자체로 전혀 멋지지 않게 되자 그들의 자식 세대는 정반대의 ‘Cool’을 선택했다고 한다. 맥루한의 에피소드에서와 비슷하게,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의무교육으로 배워온 우리는 ‘미지의 무언가’를 의미하기 위해 바다 건너 이국의 단어를 빌려 쓰는 의도를 체감하지 못한다. ‘Something’이라는 영어 단어가 그 의미(알 수 없는 무언가)를 기호 자체에서부터 느끼게 해주는 건 우리 부모 세대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굳이 영어를 쓰는 대신, 역설적이지만, 영어보다 대중문화에 덜 친화적이어서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비롭게 느껴지는 우리말 ‘무언가’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 ‘Something’의 향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동안 내팽개쳐져 있던 이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새 쓰임새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썸’이다. 물론 이마저도 다시 한번 구태의연하고 철 지난 느낌을 풍기는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나보다 어린 세대가 방금 저 단어를 읽었을 때, 마치 내가 한 평론가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 나름의 게슈탈트 쇼크를 경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보다 어린 세대에게 그런 효과를 일으키지 않는, ‘썸’ 같은 과거의 용어가 아닌 따끈따끈한 말을 들고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내가 앞서 언급한 세대론을 씁쓸하게나마 뒷받쳐준다고 할 것이다. 아무튼, ‘썸씽’은 연애와 사랑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맥락에 고정되어 ‘썸’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썸’은 단순히 연애와 관련한 경험 일반(혹은 일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수)에 아무렇게나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상태 혹은 단계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무엇인지를 규명해주는 한 소절의 대중가요 가사가 뒤이어 등장한다.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
사실, 연애를 둘러싼 우리나라의 관습 중에는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전통인지와 관계없이) 다른 문화권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 즉 타자화를 경유하여 재인식의 대상이 된 것이 하나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서양에서는 ‘사귀자’라는 낯간지럽고 (때에 따라) 우습기까지 한 말을 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혹은 적어도 우리의 대중문화는—연애를 철저한 자기화로 이해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에서 연애 파트너는 서로가 서로에게 합의하에 되어주는 사유재산 같은 것이다. 재산이기에 그것은 제도적 규정을 누리는 것이고 따라서 다른 문화권에 비해 불륜에 관한 사회적 공분이 극렬한 편이다. 이는 분명 당사자들 간의 문제임에도 우리는 불륜을 하나의 사회 공동체적 윤리의 잣대로 심판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연애와 사랑을 철저히 자기화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다시 저 가사를 본다면, 왜 저것이 ‘썸’의 의미를 깔끔히 규명해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말했듯이 연애는 ‘합의’된 사유재산화(자기화)다. 그런데 그 합의의 절차가 어째선지 실종된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두 사람 사이에 축적되고 있는 경험들은 연애 감정의 개연성을 주장하지만 합의의 부재로 인해 양자가 서로에게 재산임을 공증받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소유 개념을 통해 썸을 합의되지 않은, 그래서 불안한 연애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그러므로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다.
그런데 이러한 합의 과정으로서의 고백 절차에 관해 이따금 ‘썸’의 세대와는 다른 경험을 진술하는 윗 세대를 만날 때가 있다. 이들은 ‘우리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관습이, 앞 문단에 달아둔 단서처럼, ‘얼마나 오래된 전통인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나는 여기서 내가 지닌 한 가지 공상을 소개할까 한다. 우리 세대가 부모의 세대와 달리 일찍부터 누린 것은 영어 의무교육만이 아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휴대전화를 가지고 자란 세대다. 휴대전화와 함께 보급된 것 중에서 연애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인가? 단연코 문자메시지 기능이다. 문자는 편지나 삐삐로 소통하던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소통의 시간 간격을 단축시켰다. 며칠, 아무리 짧아도 몇 시간은 기다리기 일쑤였던 이전의 기술들과 달리 문자메시지는 시도 때도 없이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심지어 우리는 스마트폰과 함께 사춘기를 통과했다. 스마트폰 시기에 오면 문자메시지는 화룡점정에 이른다. 바로 ‘읽음 확인’ 기능을 탑재한 메신저(채팅)앱이 사용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변화의 방향은 일관되게 ‘시간의 단축’을 향해 있다. 표면적으로는 응답 시간의 단축이며 보다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방을 표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의 단축이다.
현대철학이 타자를 사유하며 별의별 복잡하고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비난조의 멸칭이나 들었지, 그들이 끝내 이해시키지 못한 대중들에게 표상 활동의 시간성을 단번에 직관적으로 이해시킨 것은 다름 아닌 대중가요와 스마트폰이었다. ‘썸’과 실시간 채팅앱의 관계는 너무도 명백해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애가 곧 자기화라면, 표상의 현재화, 다시 말해 즉각적 재현의 가능성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연인들 사이의 문제는 오로지 메시지에 늦지 않게 응답하는 것이다. 대화를 지연시키고, 도래를 미룰수록 메시지를 보낸 쪽에서는 자신의 사유재산을 자기화하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는 경험에 노출되고 이는 그들의 관계가 합의에서 벗어났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썸’이 아니라 ‘내 꺼’임이 명백하다면, 즉시 답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썸’의 채팅은 어떠한가? 연애 감정을 주장하는 경험, 즉 연인들의 대화는 지속될지언정 결코 현재화를 순순히 내어주지 않는 방식일 것이다. 그래서 ‘썸’은 늘 고민한다. 언제쯤 나를 표상하도록 허락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쯤 그/그녀는 도래할 것인가?
레비나스는 이렇게 타자와의 관계 속에 근본적으로 자기화 실패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선구한 인물이다. 그는 표상의 시간성과 관련하여 지연되는 도래를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또한 이것을 거리의 측면에서 서술하기도 했다. 그는 거리가 자아의 소유, 즉 자기화에 근본적인 요소라는 점을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서 말하고 있다. “자아는 주어진 것을 소유한다. 그러나 자아는 이 소유물에 의해 매몰되지 않는다. 자아는 대상에 대해 거리를 유지한다.”(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그리고 그는 자아가 자기성을 구현하는 방식으로서 이렇게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손을 자유로운 상태로 가지고 있는” 소유라고 표현한다. 완전히 내 것이 되지 않고 아직은 자기로 남아 있는 썸의 상대가 내게 답장하지 않고 있을 때, 내가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나타나지 않을 때 그는 어떤 상태인가? 그야말로 ‘손을 자유로운 상태로 가지고 있는’ 이가 아닌가? 그러나 대중은 레비나스를 읽지 않고도 ‘썸’의 존립 방식을 이미 거리 개념 위에서 이해하고 있다. 메시지가 왔음에도 바로 나타나지 않고 자기성을 주장하는 행위를 우리는 뭐라고 일컫는가? 바로 ‘밀당’이라 한다. 상대를 밀기도, 당기기도 하면서 자유자재로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썸’으로 관계 맺고 있는 이들의 행동 양식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레비나스를 읽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말했듯이 그가 이렇게 자기화로 이해된 타자와의 관계에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실패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당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밀기를 가능케 해주는 근본 조건이 다른 한쪽의 밀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내가 밀당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밀 때 밀려가고 당길 때 당겨져 올 수 있도록 상대방은 스스로 거리 조절의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여야 한다. 또한, 상대방도 ‘썸’에 참여하고 있는 이상,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그가 밀당의 주체일 때 자기화에 실패해야 한다. 즉, ‘썸’이 존립하는 방식으로서의 ‘밀당’은 일정 정도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유발한다. 그러다 서로 장단을 맞추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한쪽에게 남는 것은 상처다. 합의된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합의는 그 내용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맺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언제든 파기될 수 있다. 그때 남는 것도 상처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고통과 상처를 “자아 안에 있는 타자”(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라고 일컫는다. (물론, 대 철학자의 관심이 한낱 사랑놀음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과 상처의 가능성은 근원적인 것이라서 우리가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있는, 제거하려 한다고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수동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고통과 상처를 느끼는 것은 우리지만, 그것들은 “작용받는 그것의 능력 너머에서”(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 오는 것들이다.
‘썸씽’이든, ‘썸’이든 어떻게 말을 바꾸어도 애초의 의미는 결국 때를 기다렸다 고개를 든다. 그것은 아직 알지 못하는(미지의) 것, 그래서 아직은 달리 호명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나 호명할 수 없다는 것이나 모두 함축하는 바는 같다. 자기화의 실패 말이다. 즉, ‘썸’이라는 말은 나에게 완전히 주어지지 않는 타자의 근본적인 성질을 가리켜 보인다. 그렇다면, 같은 말이 나에 관해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나 역시 (다른 이유에서) 이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밀당으로 고통받을 때나 돌아오지 않는 타자에게 상처 받을 때 우리는 식음을 전폐하지 않는가? 가령, 학교에서 애인과 헤어지고 돌아온 날 저녁 식탁으로 나를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외면했던 것처럼. 그때 나는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는, 이름 없는 자였다. 다만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 그/그녀를 그리워하고 그/그녀의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이라고만 나를 일컬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정말로 문자가 왔을 때,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제야 누군가에게 불리어지고 즉시 그 호명 앞으로 이끌려가지 않는가? 그가 불러주는 그 순간이 오기까지 나는 이름 없는 ‘익명적 존재’다. 김춘수의 꽃은 도대체 얼마나 더 지겹도록 낭송되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