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eckkhere Oct 06. 2020

지목의 두려움, 혹은 즐거움

COVID-19, Among us.

    올해 초, 코로나가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방역 실무 체계가 갖추어지던 즈음, 대중들 사이에는 경각심과 정보가 동시에 유통되고 있었다. 경각심과 공포를, 정보와 유언비어를 구분하기 참 어려웠던 그때, 지금은 거의 잊힌 사건 하나가 있었다. 한 확진자의 이동 경로 및 이용 시설 등이 공개되면서 그의 부도덕한 사생활이 드러난 것이다. 그게 사실인지는 당시에도 지금도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 않다고 해야 옳으리라. 신상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사정은 대구에서 종교활동과 관련된 대규모 전염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훨씬 더 극렬한 분노가 확진자를 향하고 있었다. 이후 '합리적인' 방역지침과 그것을 강제하는 각종 법률 및 명령 등에 따르지 않는 이들은 단순한 범법자가 아니라 체제나 공동체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이들로서 거센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항상 사회적 배제에 준하는 징벌을 요청했다. 아니, 그들이 '합리적'이기를 포기한 순간 이미 그들은 배제되었다고, 그러니 이후의 어떠한 징벌도 지나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인권위 "'코로나19' 확진자 동선 공개 과도해…사생활 침해 우려〉(아이뉴스24, 권준영, 2020.03.09)
〈코로나19 동선공개가 사생활 침해면?…"이의제기해 정정 가능"〉(연합뉴스, 서한기, 2020.03.17)
〈'단골도 피하는 확진자 낙인, 지워 드립니다' 8일간 민원 506건 해결〉(뉴스1, 정재민, 2020.05.31)

    하지만,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금방 제기되었다. 대중에 의해 지나친 공분의 대상이 되는 사례나 정부로부터 지나치게 징벌적인 대응을 받는 사례가 반복될수록 확진자들이 동선 공개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진자의 사생활과 관련된 선정적인 보도나 필요 이상의 정보 공개, 인신공격 등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뒤를 이었다. 심지어는 식당이나 카페 등,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업장은 방역 작업이 끝난 뒤에도 손님이 끊겨 큰 타격을 입기 일쑤라는 이유에서, 공개되어야 할 근거가 더 이상 없는 정보는 인터넷상에서 지워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시간은 흘렀지만 상황은 비슷하게 지속되고 있다. 상반기부터 재택근무를 시행하거나 가족 외 모임, 야외 여가활동 등을 금지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는데, 이러한 상태가 길어짐에 따라 재택근무 마감 시간보다 일찍 외출하거나 허락되지 않는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금지하지 않았을, 참아야 하지도 않았을 일상생활이 너무도 그리워서 회사의 지침을 몰래 어기는 이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들에게 문제는 본인들도 전염의 가능성을 잘 알고 있다는 데 있다. 회사 몰래 금지된 외출을 시도했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확진자 판정을 받게 되었을 때, 혹은 밀접 접촉자라고 연락을 받아서 자가격리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는 회사 측에 경위를 알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침 위반이 적발될 터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감염 자체보다도 적발을 두려워하고 있다.


    길게 썼지만, 결국 이 사례들은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의학적인 위협이나 두려움과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가리켜 보인다. 그것은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지금, 마스크가 벗겨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어제까지는 마스크를 쓴 수많은 행인들 중 하나였는데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공동체의 건강한 존속보다는 개인의 쾌락과 유희만을 우선시한 배신자, 위법자, 파렴치한이 되어 이웃들 앞에 발가벗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왜 했는지 낱낱이 파헤쳐지는 순간이, 법의 예외 없는 칼날 앞에 겁먹은 채 그 모든 것을 내 입으로 하나하나 고백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직장에서의 불이익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모르는 익명의 대중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툭하면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벌금이 되었든 피해보상금이 되었든 금전적 책임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무지막지한 대가들을 치르게 될 줄 알면서도 잠깐의 즐거움에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는 사실, 그 사실에 대한 기억이 나를 계속해서 괴롭힐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의 지목에 따라온다. 어느 날 갑자기 열이 오르고 인후통이 느껴지면, 어느 날 갑자기 보건소에서 밀접 접촉자라고 전화가 오면, 어느 날 갑자기 '양성' 판정을 받았으니 안내에 따르라는 문자가 오면……. 결국 벌벌 떨 만큼 무서운 것은 지목되는 일, 호명되는 일이다.


    코로나 때문에 여가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생기면서 각종 취미와 즐길거리가 여러 차례 유행해왔다. 아마도 지금 가장 뜨거운 유행 중 하나는 <어몽 어스Among us>라는 게임일 텐데, 이 제목이 낯선 사람도 있겠지만 게임 자체는 그리 낯설지 않다. 여러 가지가 추가되긴 했지만, <어몽 어스>는 결국 온라인에 옮겨진 '마피아 게임'이기 때문이다. 임포스터(마피아)가 정해지면 크루원(시민)들은 자신들 사이 숨어 있는 그를 찾기 위해 의심되는 정황이 발생했을 때 회의를 소집해 용의자를 지목한다. 지목된 용의자는, 마피아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투표를 거쳐 심판을 받는다. 원래 마피아 게임이 그랬듯이, 이 게임이 주는 즐거움은 순전히 지목하고 적발하는 데, 혹은 지목되고 적발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하는 데 있다. 그 스릴과 서스펜스가 아무런 보상 없이 끝나는 매번의 스테이지에 유희를 가져다준다. 지금, <어몽 어스>가 유행하는 데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지목되어도 괜찮은 세상, 적발되어도 안전한 세상, 손가락질pointing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희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아무에게나 손가락질 하고 싶은, 누구든 마음껏 지목할 수 있는, 콕 집어 심판대에 세우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든 <어몽 어스>가 입맛에 맞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작가의 이전글 썸씽에서 썸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