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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ckkhere Oct 19. 2020

들뢰즈의 <기호>와 파솔리니의 <자유간접화법>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맘마 로마》(1962)

I. 들어가며: 시영화와 자유간접화법

파솔리니의 작품을, 심지어 그의 초기작을 분석하고 비평할 때, 시인이자 영화이론가이기도 했던 그의 이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어떤 층위에서는 이러한 고려가 작품의 외부를 끌어들이는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안쪽과 바깥쪽을 정확히 어디에서 구분할 것인지에 관해 적어도 한 번 문제를 제기한 이후라면, 이러한 개입이―데리다식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범람’이―텍스트에 어떤 힘을 불어넣는 활동이라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파괴적인 동시에 창조적인 힘을.

그렇다면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명백하다. 바로 그가 제창한 ‘시(詩)영화’의 개념과 그것을 정의하기 위해 그가 의존하고 있는 ‘자유간접화법’ 개념이다. “파솔리니는 영화의 전통이 ‘산문의 언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러티브적 산문의 언어’로 이루어져왔다고 지적한다.”1) 그가 주장하고 추구했던 바는, 그러한 내러티브적 산문의 언어가 아닌 시적 산문의 언어로서의 영화였다.2) 시영화란 그런 영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내러티브적 언어와 구분되는 시적 언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자유간접화법이다.

자유간접화법이란 소설 문학에서 발화자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도록 대사를 기술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따옴표나 ‘-가 말했다’ 등의 표현 없이, 심지어는 내적 독백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표지도 없이 기술되기 때문에 독자는 발화 주체가 인물인지 작가인지 알 수 없다. 파솔리니는 이러한 자유간접화법이 영화에서도 가능하며 그것이 영화의 언어를 시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화가 문학의 자유간접화법을 구현하느냐는 문제로 향한다. 파솔리니는 문학이 발화 주체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자유간접화법을 달성한다면, 영화는 보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같은 곳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특정 쇼트가 등장인물의 시선인지, 작가(연출자)의 시선인지를 모호하게 만들 수 있고 그리하여 시적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에게 우선적인 과제는 파솔리니의 작품에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이다. 나는 이 작업을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나타난 들뢰즈의 인식론을 경유하여 수행할 것이다. 들뢰즈의 ‘기호’ 개념과 진리 찾기에 대한 그의 이론을 경유할 때, 파솔리니의 작품 속에서, 특히 《맘마 로마》의 가장 먼저 오는 장면 속에서 어떻게 영화의 자유간접화법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II. 《맘마 로마》의 기호들

《맘마 로마》는 결혼식 연회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품을 통틀어 “그만큼 축소된 공간에서, 그만큼 빠른 속도로, 그만큼 많은 기호들을 방출하고 집결시키는 영역은 없다.”3) 여기서 “기호는 어떤 행위나 생각을 대체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기호들은 행위와 생각의 구실을 한다.”(25)4) 가령, 맘마 로마와 카르미네 그리고 클레멘티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부를 때 각각의 노래는 상대방에 대한 노래 부르는 사람의 사유와 행동을 대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난이나 조롱, 경고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러한 사교계의 기호들은 “다른 어떤 것, 즉 외재적 의미나 관념적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25) 그저 사유와 행동을 직접 대체할 뿐이다.

또 다른 종류의 기호도 있다. 바로 사랑의 기호다. “사랑의 기호, 예컨대 애인이 나에게 보내는 미소는 애인이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 기호는 애인이 다른 상대에게 그 기호(미소)를 보내고 또 그 상대와 밀회를 가질 수도 있는 하나의 <가능 세계>를 가리킨다(그리고 이 때문에 남자는 질투에 휩싸이게 된다).” 《맘마 로마》의 연회 장면 속에서 이 사랑의 기호를 찾자면, 맘마 로마와 카르미네가 주고받은 노랫말들이 될 것이다.

맘마 로마: , 향기로운 아카시아꽃/노래할  기쁨으로/내가  이야기하면/ 축제를 망칠 거예요
카르미네: 오 위선자의 꽃이여/넌 성녀처럼 웃고 행동하지만/너의 마음은 분노로 폭발할 것 같지?
맘마 로마: 오, 박하꽃이여/잠자코 있으라고/우리 중에 순진한 사람도 있으니/그게 더 낫지… 그녀가 모르는 게 말이야

이때 이 기호의 해석자는 그들을 옆에서 지켜본 클레멘티나다. 특히 맘마 로마가 ‘순진한 사람’이나 ‘그게 더 낫지, 그녀가 모르는 게 말이야’라고 노래할 때 클레멘티나는 자신이 모르는 남편에 대한 비밀이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두 사람이 그것을 자기로부터 숨기고 있으리라는 것도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화가 난 것이다. 맘마 로마 때문에 결혼식 날부터 남편을 의심하게 되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기호가 더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 “예술의 기호”라고 부르는 것이다.5) 예술의 기호는 해석자가 “더 멀리 갈 수 있게” 해주는,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37) 지금 분석하는 장면에서는 바로 돼지들이 예술의 기호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이 결국 신성모독이라는 관념적 의미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6)

왜 돼지들의 의미가 신성모독으로 이어지는 걸까? 그 이유와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쇼트에서 맘마 로마에 의해 연회장으로 몰려 들어오고 있는 돼지들을 봤을 때만 해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 안쪽 공간을 〈최후의 만찬〉에 상응하는 회화적 구도로 묘사해놓은 두 번째 쇼트가 이어지면 이 돼지들이 신성한 공간으로 불러 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사 여기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할지라도, 기독교적 신성을 연상시키는 요소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카르미네가 맘마 로마에게 성녀 행세를 한다고 할 때나 그가 조용히 ‘성부, 성자, 성신(성령)’을 부를 때처럼.

그런데 이것은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기호의 작동 방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우선, 그는 “우리가 사유하고자 하는 선 의지나 본성적으로 참된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는 점”이 철학의 잘못(40)이라고 지적하면서 프루스트가 철학과는 전혀 다른 앎의 방식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한다. 프루스트가 그의 작품을 통해 옳게 보여준 바는,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어떤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39)라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진리 찾기를 시작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바로 기호다. 즉 들뢰즈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진정한 인식은 결코 우리의 자발성과 능동성에 달린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사유하도록 이끄는 기호라는 것과의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41)

그렇다면 이처럼 우연히 시작된 비자발적 진리 찾기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여기서도 들뢰즈는 전통적인 철학과 다른 태도를 보인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기호 그 자체의 전개와 섞여 버린다. 바로 이 때문에 『찾기』는 항상 시간에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42) 들뢰즈가 전통적 인식 모델에 대립하여 내세우는 ‘배움’이란, 시간을 요구한다. 처음부터 기호의 의미를 설명하고 진실을 획득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로지 시간을 통과해서만,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를 문득 불러 세워 과거의 기호가 지니고 있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일깨워주는 경험을 마주함으로써만 진실에 이른다.7) 따라서 진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수많은 기호를 맞닥뜨리며 지나 보낸 시간은 모두 ‘잃어버린’ 시간이다. 깨우치지 못한 채로 흘러간, 헛되이 보낸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헛되이 보내 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47)


III. 자유간접화법을 통한 예술의 기호 생산

세 사람이 주고받는 노래가 있었고, 클레멘티나를 화나게 만든 맘마 로마의 의뭉스러운 노랫말이 있었고 돼지들이 있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앞의 둘과 세 번째 사이의 차이다. 세 사람이 서로를 향해 노래로 대신하고 있는 말과 행동은 그 파티에 참석한 이들에 의해 해석된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조차 우리는 하객들 중 한 명이 되어 봄으로써 그렇게 한다.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로 클레멘티나라는 인물에 의해 그 의미가 해석된다.

그런데 마지막 경우는 어떤가? 우선, 신성모독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결혼식 연회장에 돼지를 몰고 들어오는 것 자체는 하나의 사교적 기호로서 신부와 신랑을 조롱하고 놀리는 장난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혹은 장난을 넘어 ‘모욕’일 수도 있다.8)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연회장에 있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그들의 위치에서 해석된 의미일 뿐이며 맘마 로마가 돼지를 데리고 온 행동을 하나의 기호로 보았을 때 수행된 해석일 뿐이다.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생각을 하도록 만든 첫 번째 쇼트의 이미지 자체를 기호로 삼는 해석이 아니다. 그 쇼트를 마주했을 때 우리의 정서가 당혹감이든 호기심이든, 그것과 그것이 촉발한 해석의 몸부림은 영화 속 인물의 시선을 벗어나는 진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진실이 설명되기 전까지는 해결될 수 없다. 첫 번째 쇼트와 두 번째 쇼트의 관계를 숏-리버스숏으로 보고 전자의 의미를 카르미네라는 인물의 관점에서 설명하려 한들,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첫 번째 쇼트 때문에 우리가 찾아 나서게 되는 의미는 더 이상 내러티브로 환원되지 않는 ‘관념적 의미’이며 그러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쇼트의 의미에 관련된 하나의 분할이 있어야만 했다. 인물들의 시선에서 내러티브 속에 존재하는 기호를 해석하는 것과 관객의 시선에서 작품의 표층, 즉 화면에 존재하는 기호를 해석하는 것의 분할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서사 밖에서 영화 이미지에 대해 수행되는 해석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솔리니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와 만난다. 요컨대 신성모독이라는 의미로 해석된 돼지 세 마리의 이미지는 들뢰즈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고 설명했던 ‘예술의 기호’이며 이 기호를 가능하게 한 데는 파솔리니가 자유간접화법을 통해 조명하고자 했던 모호함, 즉 보는 주체의 모호함이 놓여있는 것이다.


IV. 나가며

《맘마 로마》가 의미작용의 원천으로 기독교 회화와 상징들을 가진다는 것은 많은 비평가, 학자에 의해 이야기된 정설이다. 그리고 이미 정설이 마련되어 있는 고전을 상대로 새로운 성찰을 시도하는 것은 무모함과 자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일일 것이다. 심지어 감독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작품에 대한 이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경우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하지만 그럴 때도 비평은 닫힌 과제가 아니다. 아직 연구되지 않은 실마리가 작품 속에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니까.

물론, 이 글은 자신의 무모함 혹은 자만을 버텨내지 못했다. 보다 창조적이고 매력적인 작업이 되기 위해서는 이 글이 첫 번째 장면에서 분석하고 있는 내용과 그 분석의 심도를 작품 전체로 확장할 수 있는 지구력이 우선 필요했고 나아가 이론(들)과 작품을 화해시키는 척 작품의 생기를 지성적 분석 아래 매개하는 대신, 자꾸만 삐져나가는 살점 하나를 건져야 했다. 그러므로 이 글이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들뢰즈의 인식론을 내세우든 간에, 나는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지 못했다고 해야 하겠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이 글이 이웃들과의 모임을 위해 쓰인 만큼, 그들에게는 작은 마들렌이나 포석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무지막지했던 김곡의 첫 문장처럼, 시간이 소멸이라면, 《맘마 로마》의 소멸 뒤에 어떤 진실이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에게 찾아지기만 기다리고 있기를 바란다.




1) 윤혜경,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시영화” 개념에 관한 고찰」, 『미학』 제80집, 2014, 240.

2) 파솔리니에 따르면, 영화에서는 시적 언어와 산문적 언어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산문의 언어와 내러티브적 산문의 언어가 구분된다. 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지라도 영화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윤혜경, 앞의 글 참조.

3) 질 들뢰즈, 서동욱·이충민,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24. (이하 본문 괄호 속에 쪽수만 표기)

4) 여기서 나는 기호에 대한 들뢰즈의 정의를 따른다. 즉 기호란 그것을 마주했을 때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가리킨다.

5) 실제로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 제1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기호들은 총 네 종류로 구분된다.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감각적 기호 그리고 예술의 기호. 마지막 예술의 기호가 들뢰즈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리 찾기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내는 동시에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다루어진다. 다만, 지금 분석하고 있는 《맘마 로마》의 첫 번째 장면에 들뢰즈가 ‘감각적 기호’라는 이름으로 프루스트로부터 발견하는 것(가령, 마들렌 체험 등)에 해당하는 뚜렷한 사례는 없다.

6) 이나라, 인류학적 이미지와 형상적 섬광, 아시아영화연구 12권 2호, 2019, pp124, “돼지 세 마리가 ‘삼위일체’를 환기하는 동시에 모독한다면…….”

7) 이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단지 잊고 있었을 뿐인 지식을 다시 기억해내는 회상의 작업이 아니다.

8) 이나라(2019), 앞의 글, pp123, “이어지는 몇 개의 숏과 리버스숏은 카르미네와 하객들과 그 맞은 편 온 몸에 진흙더미를 묻힌 채로연회장 바닥을 계속 더럽히고 있는 돼지 세 마리와 함께 서 있는 맘마로마가 주고받는 모욕적 축하를 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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