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솔 Feb 12. 2019

수원에서 생각한 것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카모메 식당>

왼쪽은 카레 오른쪽은 방화수류정

수원을 다녀왔다. <카모메 식당>을 모티브로 한 느리고 아담한 공간에서 구운 채소들이 퐁당 빠진 조금 묽은 카레를 첫 끼로 먹었다. 적당한 배부름을 안고 화성의 방화수류정에 갔다. 뼈만 남은 버드나무들과 회색 철새들이 푸덕이는 호수, 성곽 끝에 휘날리는 깃발과 앨리스의 토끼굴 같은 입구를 지 높은 곳의 정자가 있었다. 나 보다 나은 사람 둘 사이에 껴서 성곽을 따라 오래 걸었다. 셋은 크고 멋진 곳을 발견하면 영상을 찍었다. 재밌게도 한 명은 강 씨인데 강(江) 같고 다른 이는 양 씨인데 양(羊) 같다. 그들 덕에 아주 추운 날씨가 괜찮았고 그들이 염려되어 속상했다.



책방 브로콜리 숲

몸을 녹이러 실내에 들어갔다. 책 하나씩 똑 떼어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전하고 싶게 만드는 책방이었다. 주인장이 수원 사람이냐고 내게 물었다. 외지인 티가 난 모양이다. "미래의 수원시민이에요!" 애살맞게 답했다. 큰 목소리 탓에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자주 겪는 일인데 늘 부끄러워 호다닥 밖으로 나섰다. 선물용으로 산 책을 정성과 걱정을 담아 포장해주던 주인에게 관심받았다! 헤벌쭉.



왼쪽은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오른쪽은 따라하는 나의 모습
이번엔 왼쪽이 나의 모습 오른쪽이 영화 지맞그틀
어느 쪽이든 영화이며 현실

현 수원 시민 둘 나중 수원 시민 하나는 추위에 덜덜 떨며 행궁으로 갔다.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고 마음에 들었던 장면을 쫒다가 알게 된 복내당. 복 복 자에 안 내 자다.(영화에서 함춘수 감독을 연기한 정재영이 대사로 읊조리기도 했다.) 이름이 그래서인지 머물면 참 편안한 기분이 들어 항상 바나나우유를 들고 앉아 햇볕을 구경하곤 했다. 추울 때 오니 그 맛이 안 났다. 영화 속은 겨울이었는데 현실은 겨울이 아닐 때가 좋은 것이다. 엉덩이가 차가워 얼른 나가게 되었다. 봄이 오면 아주 오래 앉아 있으리.



왼쪽 김민희 배우 오른쪽 나. 민희는 아무나 따라하는 게 아니고 나는 아무나다...

최종 목적지는 역시 영화로 인해 들렀다가 영혼의 공간이 돼버린 찻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계피 향이 진하게 났다. 이곳의 고유한 향이다. 오래된 종이 냄새 같은 것도 섞여 있다. 적어도 80년대부터 벽과 방명록에 쓰인 사연들의 체취이기도 할 테다. 선생님(사장님)이 한결 같이 고운 결로 반겨주셨다. 강은 매화차 양은 국화 나는 오미자차를 마셨다. 상에는 감주가 담긴 큰 자기 그릇이 하나 더 나왔다. 선생님은 늘 무언가를 얹어주신다. 평일 저녁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이유가 영화를 보고 산책도 해야 하기 때문인 사람의 여유인 것일까? 찻집에 가득 쌓인 옛 물건들과 영화 DVD, 책, 화장실에 주기적으로 덧붙여지는 신작 포스터들을 보면서 원래는 지금의 몇 배 더 넓은 공간이었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앞의 이유들로 좁아지는 방은 참말로 낭만적이다.



여기서 우리 셋은 서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화했다. 응원하고 위로하고 그랬다. 나는 그들의 잘 듣고 잘 반응하는 면을 닮고 싶고 좋아해서 함께 이야기하는 동안 관찰하기도 했다. 둘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선생님이 챙겨주신 감주를 들고 시농을 나왔다. 셋은 수원역에서 헤어졌다. 강은 편의점에 다녀오더니 내 짐들을 넣을 가방을 사 왔다. 빨리 도착하는 차편을 알려주고,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 집에 갔다. 상대가 온기를 쥐고 귀가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성곽을 걸을 때 강이 어떤 이야기를 건넸었다. 내가 요즘 예민하게 여기던 일을 알아주는 기분이 들었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안정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날은 강이 나를 참솔이라고 부른 첫날이기도 하여 따따블로 다정했다.



수원을 다녀온 이야기가 끝났다. 기억은 과거의 것이지만 회상은 미래의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이날의 페이지를 찾아볼 수 있다. 강과 양, 겨울 한기, 그래서 더 따뜻했던 브로콜리 숲과 시농, 나의 부족함과 즐거움들이 적힌 두 쪽 정도의 기억 모퉁이를 살짝 접어놓았다. 다시 가기 전까지 자주 읽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경주>와 도시 경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