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덕 <섞여진 이름들> 展에 다녀와서
흑백 사진 속 동양과 서양의 느낌이 섞인 얼굴을 가진 아이가 물끄러미 프레임 너머를 쳐다보고 있다. 커다란 눈망울은 아이답게 천진난만하기보다 차분하고 담담하다. 마치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듯이. 혼혈아로 태어나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살아가는 이 아이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 앞에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다.
다만 슬픈 눈망울로 그 운명을 태연히 맞이할 뿐이다. 굳은살 같이 베긴 슬픔 속에 일찍이 성숙한 이 아이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 사진은 1965년에 주명덕 작가가 찍은 <홀트씨고아원> 시리즈 중 한 작품이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누나가 봉사하던 해리홀트기념고아원을 찾아가 만나게 된 혼혈고아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한다.
1966년 4월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던 이 작품들이 8월 8일까지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섞여진 이름들>이라는 큰 타이틀 아래 <운천>, <용주골> 등의 시리즈와 함께 전시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한미군 주둔기지 주변에 ‘기지촌’이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지촌은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 일쑤였다. 바로 기지촌이 성매매 성행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빈곤한 시기 직업소개소를 찾은 어린 여성들이 주로 기지촌으로 팔려왔으며 이들은 포주의 감시 하에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1960년대 한국 정부가 ‘윤락행위 등 방지법’에 근거해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지했으나 이 지역은 예외였다. ‘특정 윤락지역’이라는 이름 하에 전국 104개소의 성매매지역이 설치되었고, 이 곳에서 미군의 성매매는 사실상 허용되었다. 더 나아가 미군 측에서 성병에 대한 우려를 표하자 ‘낙검자 수용소’를 통해 미군위안부 여성들에게 비인간적인 방식의 성병검사와 치료를 강제하는 등 정부는 기지촌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외화벌이의 역군’ 또는 ‘민간외교관’이라고 치켜올렸으나, 대중에게 이들은 한국인도 아닌 외국남성에게 몸을 파는 ‘양갈보’ 혹은 ‘양공주’일 뿐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3년에 발표한 <기지촌 혼혈인 인권실태조사>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한국 사회 내에서 ‘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의’ 최하층계급”이었다고 한다.
미군 남성과 기지촌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또한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부계혈통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에서 혼혈아들은 오점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튀기’ 등의 혐오표현을 마주해야 했으며, 길을 가다가도 사람이 지나가면 얼굴을 벽에 묻고 숨어야 했다. 자신이 누군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학교에 가더라도 놀림을 받아 그만두기 십상이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더미, 미군들의 무책임한 태도,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위안부 여성들은 아이를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입양을 기다렸다.
당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 기지촌 여성들의 현실과 고아원 속 혼혈아들의 이야기들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 주명덕 작가였다. ‘사실성’과 ‘기록성’에서 사진의 가치를 발견한 그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불편한 현실을 가감없이 프레임 안에 담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회에게 질문을 던졌다.
혼혈고아를 그 대상으로 한 것은 우리의 현시점에서 사회와 국가와 민족이 다 함께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공동의 문제가 거기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긍정보다는 부정을, 밝은 이야기보다는 어두운 이야기는 매우 아픈 일이다. 고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두운 이야기를, 그리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문제점을 포착, 제시하려고 했다. 혼혈고아들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피어린 비극의 부산물, 그 책임을 이제 나는 누구에게 물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들을 되씹어본다. 6∙25 전후 15년, 민족의식, 뒷처리… 이런 많은 의식 가운데에서 혼혈고아들의 문제를 들추어 내었을 뿐이다.
- 1969년 6월 주명덕
작가는 살롱사진이 유행하던 이 시기에 니콘카메라를 들고 한국사회를 누비며 묵묵하게 당시의 현실을 기록했다. 그를 통해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하던 이들의 삶을 조명하고,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시대의 증언이 되어 후대 관람객들이 이들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희미하게 기억되었다 사라지는 역사 속 소수자들에 대해 기억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 몸을 팔아야 했던 미군위안부들, 그리고 차별 섞인 시선 속 슬픔을 감내해야 했던 혼혈고아들. 벽에 걸려있는 이들의 사진과 눈을 맞추다보면 5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게 된다. 작가가 말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가치가 바로 이런 데 있는 게 아닐까.
*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라는 문화예술 웹사이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