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3일의 울림
꽃은 그렇게 해마다 오지만
그들이 웃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일로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이 있었는데
자꾸 웃으라 했네
거듭, 웃으라 주문을 했네
울고 싶었네
아니라 아니라는데 내 말을 나만 듣고 있었네
뜰의 능수매화가 2년째 체면 유지하듯 겨우 몇 송이 피었다
너도 마지못해 웃은 거니?
간유리 안의 그림자처럼, 누가 심중을 다 보겠는가마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소 친절' 띠를 두른 관공서 직원처럼
뭐 이렇게까지
미소를 꺼내려 하시는지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다
그러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다
이규리, '내색',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2014), 18p
가장 좋아하는 시집 중 하나인 이규리 시인의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을 2년 만에 꺼내 들었다.
다가오는 모습은 아주 다르다. 달라진 건 시가 아니라 사람, 마음이다.
한동안은 다른 곳에서 살았다.
그곳에서는 내색하지 않는 법의 미덕을 배웠다.
나만 존재해도 되는 곳이 아니라면 그 어디든 내색은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이유는 오로지 나를 위함이었다. 타인에게 더 나은 나로 보이기 위해서.
대부분의 일들이 처음이었고, 나는 어렸다.
그 사실을 감당하기 위해선 일단 생각도 감정도 얼굴에서 지우는 것이 안전했다. 물론 잘 하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익숙해졌다. 평가당하는 나와, 남을 평가하는 내가 당연했다.
얼마 후엔 목적을 위해 내색을 이용하는 법도 배웠다. 어떤 감정을 내색하는가는 하나의 전략이었다.
쓰는 일은 내 방 서랍 깊숙이 숨겨두는 일기장에만 머물렀다.
글에는 내가 바닥까지 솔직하려 했던 노력과 그 이상 드러나버리는 것들이 묻어나서 무서웠다.
어리고 미숙한 모습들을 단번에 들키는 것은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타인들의 시선에 사로잡혀 나는 나에게서 목소리를 빼앗았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을 잊어버렸다. 말해도 된다는 당위를 잃어버렸다.
고민은 더 근본적인 부분과 연결되었다.
쓰는 이의 십자가라고 생각했던 건 자격이었다.
나의 어리석음이 누군가에게 가 닿아 생채기를 남긴다면 그 사실을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감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영역을 범하는 이기심은 아닐까.
두려움의 원인은 같았다. 미숙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스스로 견딜 수 없음이었다.
아직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회의와 무기력을 지나고 나니 기대감 없는 뻔뻔함이 생겼다.
나에 대한 욕심을 놓자 남들이 보는 '나'도 가벼워졌다.
별 거 없었다. 바득바득 애쓸 일도 아니었다 산다는 건.
절망은 무섭지만 나를 잊어버릴 정도로 긴장하며 산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의 문장이 있다.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단다.
자꾸 자신에게서 미소를 꺼내려는 누군가에게 지친 화자가 매년 피어나는 뜰의 꽃을 보며 생각한다.
너도 그러하니, 체면 유지하듯 겨우겨우 몇 송이 피고 있는 거니.
꽃에 대해 생각한다. 과연 그들은 웃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과연 웃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무심無心이 가장 깊은 배려의 방법이 될 때도 있다.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수많은 마음들을 내색해도 여기는 아직 무심할 테니,
그저 그 마음 자체로 오면 되겠다는 위로이다.
나에게 요즘 그곳은 책과 글이다.
내 곁에 누군가에게는 연인이고 친구이다. 당신에게도 있기를 바라겠다.
그저 마음으로 가면 되는 당신의 내색에 무심한 어떤 곳.
2018년 10월 3일
U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