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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Oct 18. 2024

교수도 3년차엔 이직을 한다

"저번에 말했던 동기 말이야. 더 좋은 학교로 이직했대. 나랑 실적은 비슷한데..."

남편이 교수가 된 지 3년, 가까운 이들의 이직소식을 전하며 시무룩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그를 맞이하는 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나의 3년차는 지하철역 보관함과 검정 정장으로 기억된다. 서른이던 그 해에 나는 이곳저곳으로 면접을 다녔다. 면접 보러 오라는 회사는 많았고, 매번 면접 때마다 연차나 반차를 쓸 수는 없었기에 생각해 낸 것이 지하철역 보관함. 망원역 지하철역 보관함에 면접 때 입을 정장을 꺼내두고,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면접을 보러 다녔다.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화장을 하고, 면접이 끝나면 출근할 때 입었던 옷으로 환복. 그렇게 두 계절을 지나 꿈에 그리던 회사로 이직을 했었다. 


교수사회에서도 3년차가 황금연차로 통한다는 건 남편이 아니었더라면 몰랐을 일. 같은 직업을 가진 선배나 친구 들을 만나고 올 때마다 듣는 첫인사가 "이직 안 하냐?"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실적이 좋은 3년차에 속했다. 내가 임신을 하고 나서 경주마처럼 논문 쓰는 데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를 해야 하기에 그 전에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치겠다는 생각이었다. 덕분에 몇 년 걸려 쌓을 실적을 몇 개월 만에 모두 쌓아두었고, 더 좋은 학교로 옮기기에 충분한 '스펙'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의 직장생활은 순조로웠다. 새로운 강의준비로 새벽까지 바빴던 1년차에 비하면 강의준비는 쉬웠다. 즐겨 찾는 길을 산책하는 사람처럼, 침대 위에서 가볍게 다음 날 강의를 준비했다. 어느 직장에서든 한 명쯤 있다던 빌런도 그의 직장엔 없었다. 육아대디가 대부분인 그의 직장에서 모두가 아이를 키우는 그를 배려해 주었다. 저녁회식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으레 막내교수들이 맡곤 하는 행정 일도 시키는 이가 없었다. 덕분에 우리의 일상은 편안했다. 


편안한 가운데 그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더 높은 학교의 채용공고가 뜰 때마다 '나도 확 이직해버릴까' 하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그러다가도 이내 마음을 접었다. 이때는 이런 이유로, 저때는 저런 이유로 지금 있는 학교가 더 좋다고 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는 싶지만, 지금의 일상을 깨도 좋을 만큼의 욕망은 아니었던 것이다. 


똑똑. 그러던 어느 날, 곧 흘러넘칠 물처럼 넘실대던 그의 욕망에 두 방울의 욕망이 더해졌다. 이직에 관해서만큼은 꽤 까다롭던 그가 '이 정도면 가도 좋겠다'고 생각한 두 대학의 채용공고가 연이어 뜬 것이다. 프리랜서가 되기 전엔 프로이직러였던 나는, 그의 이직에 무조건 동의했다. 거기가 어디든 몸을 움직이면 안 보이던 게 보일 거라고 망설이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부인의 등살에 밀려 그도 난생 처음으로 이직을 준비했다. 다시는 쓸 일 없을 줄 알았던 자기소개서를 쓰고, 연구실적을 정리하고, 원서를 쓰는 학교의 분위기를 수소문하느라 바빴다. 바쁜 가운데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 준비를 하고, 논문을 쓰고, 육아를 했다. 모든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연금술사가 된 것 마냥 하루를 남김없이 썼다. 그러고 새벽이 되면 안방 침대에서 곯아 떨어졌다. 


안 골던 코까지 골며 잠든 그를 마냥 부러워했다. 열심히 한다고 내세울 일이 있어서 좋겠다고, 나도 떳떳하게 말하고 아침마다 일하러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어느 덧 프리랜서 4년차. 교수를 포함한 직업의 세계에서 통하던 '황금연차'라는 말은, 프리랜서에겐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명확한 계획도 없이 '어쩌다 프리랜서'가 된 이에겐 더욱.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일을 줄이고 줄이다 거의 못 하다시피 하게 된 이에게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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