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갔다.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 집’이라 부르던 곳. 이제는 당연하게 ‘엄마 집’이라고 하는 곳. 짐을 줄여 오느라 집 안에서 입을 옷을 가져오지 않은 터라 엄마의 옷을 빌려 입었다. 엄마가 옷장에서 꺼내준 티셔츠. 검정 티셔츠엔 하얀색 글씨로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Cause I can’t stay forever 내가 영원히 머물 순 없으니까
엄마가 티셔츠로 말을 건넨 기분. 언제일지 모르지만 내게도 예외없이 닥쳐올 미래를 담담하게 이야기해 준 이국의 문장을 천천히 되짚었다. 깊은 인연으로 얽힌 우리는 영겁의 시간 중 수십 년을 엄마의 딸로 만나 공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와 내가 서로의 곁에 있는 건 숨 쉬듯 익숙한 일이지만, 그럴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Stay by my side 내 곁에 있어
연이어 떠올린 두 번째 문장. 열 살이던 내가 처음 배운 문장이었다. 영어학원에서는 한 달에 얇은 책 한 권을 함께 읽었다. 셋째주 쯤 되면 책 속의 문장을 입으로 중얼거리게 되는 날이 많았는데, 신기하게도 그때 되뇌었던 몇 개의 문장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가끔씩 떠오른다. 엄마와 함께 놀이동산에 간 아이의 이야기에 나오던 이 문장. 이 놀이기구와 저 놀이기구를 오가는 중간중간에 엄마는 허리를 숙여 아이와 키를 맞춘다. 그러고는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나의 일부 같았던 엄마가 사실은 자랄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나를 붙잡고 있던 타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우리의 몸은 접착제로 붙어 있지 않아서, 한 쪽이 힘을 빼면 서로를 놓을 수도 있다는 것. 그걸 알게 된 건 20대 중반, 첫 회사를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어린이 요리책을 만들고 있던 그날. 담당편집자라고는 했지만, 사실 어린이책도 요리책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팀장님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책에 들어갈 레시피 사진을 찍던 그날, 담당 작가님을 만나러 주말을 반납하고 쿠킹스튜디오로 출근했다. 하지만 그 책의 편집자로서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사진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요리에 사용된 그릇을 설거지하며 하루를 다 보냈다. 내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른 채 부엌에서 막힌 벽만 바라보며 접시를 닦는데 순간 엄마 생각이 났다.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해서는 그날 있었던 일을 쏟아냈다. 이야기를 듣던 엄마의 말.
“내가 가서 설거지라도 해줄 걸 그랬나?”
그 말을 들으며 알게 되었다. 이젠 엄마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내 세상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일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지금도 힘든 일에 부딪히면 자주 엄마를 생각한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나타났던 엄마의 손을 떠올린다. 크고 거친 엄마의 손. 그걸 쏙 빼닮은 내 손을 보며 ‘너는 궂은 일 안 해야 되는데… 힘든 일 많이 하면 내 손처럼 되는데…’ 하며 어린시절부터 혼잣말하던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의 손이 자주 그랬듯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꽉 잡아본다. 느껴지는 위로. 손이 쥐었다 폈다 하며 하는, 잘할 수 있다는 말. 아마도 영원히 내 곁에 머물 수 없는 엄마는 그런 말로 언제나 내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