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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혼술

by 라일락

나는 혼자가 익숙한 사람이다. 스물두 살 때부터 10년 넘게 혼자 살면서 둘이서, 셋이서, 여럿이

서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혼자 했다. 혼자 영화관에 가고, 밥을 먹고, 카페에 가고, 작은 배낭에

짐을 싸서 홀로 여행하는 것이 서글프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비옷을 입고 제주의 폭우 속

을 걷다 음악소리에 이끌려 찾은 카페에서 따끈한 커피를 홀짝이는 일. 친구의 자리에 나라는 사

람을 데려다 놓고 나와 지내는 일상은 외로움보다 다정함을 불러일으켰다.


분명히 충분하고 충만한 나날들이었는데, 내 몸은 어째선지 계속해서 불어나는 방향을 선택했다.

서른 살 여름부터는 고양이와, 서른 둘 여름부터는 남편과, 서른다섯 여름부터는 배에서 나온 작

은 생명과 차례로 가족이 되었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휩쓸리기 쉽다는 것을 안다. 한순간

휩쓸렸다고 하기엔 나는 아주 천천히, 차근차근 혼자가 아닌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낳을 자리를 찾아가는 바다거북이나 연어처럼, 나는 내 안의 촉수를 조금씩 다

듬어나갔다. 생각하지 않고 선택했다. 선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며칠의 시간을 끈

날도 사실은 똑같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결정을 내리고, 언어로 그 결정을 포장해내려 애썼다.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문제라면 더더욱 나 혼자 결정해서는 안 되기에, 파트너가 납득할 수 있는

말을 주의깊게 골랐다.


선택한 후의 후회는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사실, 미처

짚어내지 못한 문제점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내가 선택한 삶에 속해 있다

는 기쁨. 누군가는 미래의 불행을 미리 예측했다는 쾌감, 그럼으로써 좀 더 쾌적한 현재를 자신

에게 선물했다는 뿌듯함에 기뻐할 테지만 나는 불행을 온통 뒤집어 쓰고 행복해했다.


고양이가 집으로 온 다음 날, 웬일인지 퇴근하고 맥주를 마시러 가고 싶었다. 그날 마침 함께 마

실 동네친구가 있었고, 목구멍으로 맥주를 넘기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일하는 엄마들이 퇴근하면 집에 가고 싶으면서도 가기 싫다고 하잖아. 그 마음을 좀 알 것 같

아.”

1킬로그램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생명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 첫 번째 가족은 자기 몸무

게의 몇 배나 되는 마음의 무게를 내 어깨에 지워주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거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넓은 침대와 여러 개의 문이 있고, 밤이면 취객의 목소리 대신 적막이 내려 앉는 아파트. 행복이 어울리는 안락한 공간에서 허전해했다. 남편이 잠들면 거실로 나가,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마침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착각이 드는 어느 순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내 몫의 그릇과 화장실, TV를 보는 휴식시간까지 다른 이와 공유해야 하는 삶. 문을 열어도 모니터가 보이지 않도록 가구를 배치하고, 나중에는 책장을 사방에 둘러 요새를 만들었다. 그 나날들 가운데서 생명이 태어났다.

나는 왜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을까. 질문의 답 대신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나는 절박했었다. 배란유도제를 맞고 3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초음파 속 난자를 확인하며 노심초사했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꿈꿨는지는 모르겠다. 생명이 될 2밀리미터의 알이 내 안에 안착했다는 걸 확인한 순간, 놀랐다. 이 작은 알이 나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미지의 삶으로 데려가고 있음에.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뽑기상자처럼 신비로웠던 새로운 삶. 그 삶은 마침내 열렸고, 새 삶이 주는 모든 것을 나는 두 손으로 받아낸다. 뇌가 수십 개로 조각 나는 듯, 수십 개의 눈과 손이 달린 듯 부산한 삶. 부산한 가운데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로움. 혼자이던 시절에 느끼지 못한 외로움을 이제서야 끝까지 들이마신다. 빨대로 쪽, 마지막 한 방울까지. 웃고 있지만 외롭다. 늘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있지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다. 손을 잡고 싶지만, 너무나 혼자 있고 싶다. 여러 갈래의 감정들은 내 안에서 쉴 새 없이 섞이다 곤죽이 되어 끈적인다. 내 선택은 나의 몫. 이 곤죽은 나의 몫. 가만히 끌어 안는다.


말을 시작한 아이는 요즘 부쩍 이모부 이야기를 한다. “이모부가” “이모부는” “이모부한테”로 시작되는 길고 긴 말들. 아이의 이모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아이에겐 이모부가 없다. 혹시 아이가 미래에서 이모부를 만난 건 아닐까?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을 하고는 아이에게 묻는다.

“이모부 어떻게 생겼어?”

“이모부 좋아?”

천진한 엄마의 물음에 아이는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인다.


어쩌면 아이처럼 나의 내부도 미래를 알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한 번 훑고 지나간 다음, 빛보다 빠른 속도로 결정 버튼을 누르는 걸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내부가 한 선택을 더듬거리며, 허덕이며 따라가고 있는 건지도. 허덕이며 내 몫의 외로움을 받아낸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그릇보다 투명한 술 한 잔을 받아내는 사람처럼.


인생은 혼자. 둘이 있든 셋이 있든 혼자. 인생은 혼술. 눈뜨자마자 안주도 없이 홀로 마시는 술. 오늘분의 외로움은 너무 써서 지독한 독주 같다. 천천히 혀를 굴리며 음미하는 대신, 잽싸게 들이마신다. 있는대로 인상을 쓰고는 문을 열고 방을 나선다. 삶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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