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빠와 함께 할머니집에 간 주말 오후, 어쩐지 쓸쓸해진 마음으로 식탁에 앉는다. 다음 날 점심까지 이 집에서 나는 혼자다. (물론, 고양이는 함께다.) 얼마나 바랐던 자유인가. 그런데 예상치 못한 손님처럼 기습해 온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슬리퍼를 끌고 무작정 집을 나서, 마트로 간다.
과자와 맥주를 잔뜩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걸 먹으면서 뭘 볼지 생각한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코로나에 걸렸던 겨울에 혼자 보던 드라마를 이어서 볼까. 보고 싶던 영화를 마음 먹고 볼까. 안방 TV 앞에 앉아 넷플릭스를 이리저리 뒤적여 보지만,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 아이의 영상을 본다. 온갖 장난감과 책으로 어지럽혀진 거실을 배경으로 하이체어에 앉은 아이가 자기 몫의 식사를 하는 영상. 사실, 식사는 뒷전이고 식판에 차려진 놀잇감을 눌러보고 만져보느라 바쁘다. 손가락으로 연두부에 구멍을 내는 순간, 아이의 웃음이 터진다. 휴. 영상에 기록된 나의 작은 한숨. 아이의 웃음과 동시에 터진 나의 탄식. 영상을 보는 나는 어느새 아이처럼 웃고 있다. 며칠 전 영상을 찍던 나와 지금 영상을 보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영상을 찍던 내가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그냥 아이를 보는 사람이다.
엄마나 동생이 집에 오면 나는 슬그머니 육아에서 발을 뺀다. 아이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소파나 식탁에 앉는다. 누군가의 무릎에 앉아 책을 읽고, 거실의 미끄럼틀을 타며 꺄아 하고 소리 치는 아이를 바라본다. 세상 흐뭇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우리 애가 언제 저렇게 컸지?’ 하고 새삼 놀라는 일도, 아이의 어린시절을 또 한 페이지 보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일도 이 때만 가능하다. 아이에게서 한 뼘 떨어지고 나서야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아이를 돌보는 대부분의 오전과 오후에는 아이를 보지 못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시간표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옷을 갈아입히고, 밥과 간식과 우유를 시간 맞춰 먹이고, 씻기고, 콧물흡입기로 콧물을 빼고, 이를 닦이고, 로션과 연고를 바르는 일들. 그런 자잘한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된다. 틈틈이 기저귀도 확인해서 갈아줘야 하고, 물은 수시로 먹여야 지치지 않는다. 하나라도 잊으면 그날의 사이클에 문제가 생기기에, 아이와 놀면서도 머릿속이 바쁘다.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두고 부엌에서 밥을 할 때는 어깨가 한 짐이다. 혹시 아이가 넘어지거나 예상치 못한 사고를 치지 않을까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야채와 고기를 자르고, 생각난 대로 볶거나 굽거나 한다. 가끔은 생각한다. 이건 나한테 너무 버거운 일이라고. 시간에 쫓기면서 끼니를 챙기는 일. 이거 하나로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힘에 부칠 때가 있다.
한바탕 시간과의 레이스를 끝내고 아이를 재우고 나면 집의 맨 얼굴이 드러난다. 시간이 멈춘 집의 잔해들. 여기저기 흩어진 장난감과 싱크대를 가득 채운 그릇. 오늘 전투의 흔적을 하나씩 치워낸다. 모든 흔적을 지우고 말끔해진 집. 이런 하루의 반복 속에서 훌쩍 자라버린 아이를 생각한다. 벽에 걸린 50일 사진 속의 낯선 아기를 한참 바라본다. 그립다. 보고싶다. 방문을 열면 자고 있는 아이를 볼 수 있지만, 가끔은 이렇게 그리움 속에 머물러 있고 싶다. 보고 싶다는 마음. 아이를 돌보는 일과 중에는 감각할 수 없는 마음이 차오르는 걸 지켜보는 순간이 좋다.
집에서 아이 보는 게 왜 그렇게 힘드냐고 묻는 사람은 정말 아이를 ‘보기만’ 해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돌봄노동에 종사해 보니 알 수 있었다. ‘돌본다’와 ‘본다’는 전혀 다른 말이라는 것을. 돌보는 사람은 돌보는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보는 일은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만 가능한데, 돌보는 동안은 그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다.
혹여나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 중 어느 것을 밟고 미끄러지지는 않을지, 화장대나 식탁 위의 물건은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제대로 놓여 있는지, 어느 틈에 흘러 나온 콧물을 먹고 있지는 않는지. 이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돌보는 사람에게 보는 일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축복에 가깝다. 그러니 집에서 아이 보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드냐고 묻고 싶다면, 그러기 전에 제발 집으로 와달라. 10분이라도 집에 와서 아이를 돌봐달라. 그러면 나는 10분 동안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아이를 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축복은 자주 주어지지 않기에, 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선다. 집이 아닌 곳으로. 돌봄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카페로, 도서관으로, 놀이터로. 그곳에서는 신기하게도 잠시나마 아이를 볼 수 있다. 조금 더 넓어진 시야 안에 아이를 담고, 머릿속에 느낌표를 띄우는 일이 가능하다. 책과 스티커에 푹 빠진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도 그때는 가능하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책 읽어주는 누나를 만난다면? 그날은 며칠 분의 행운을 몰아 썼다고 해도 좋을 만큼 운 좋은 날이다.
옆동에 사는 라엘이 누나. 초등학교 2학년이고, 우리 아이보다 한 살 많은 동생이 있는 그 누나는 도서관에서 아이를 만날 때마다 옆에 앉혀 책을 읽어준다. 똑같은 책을 다섯 번씩 연달아 읽어달라고 해도 화내거나 귀찮아하는 법이 없다. 누나, 누나.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그를 나도 따라 누나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세상에서 제일 넉넉한 마음을 가진 라엘이 누나. 누나가 책을 읽어주는 동안 나도 손과 입을 멈추고 아이를 본다. 돌보는 사람의 일탈.
5분, 10분이 아닌 꽉 찬 하루의 일탈이 보장된 주말. 오랜만에 휴대폰 사진첩을 정리한다. 사진첩 속 아이의 사진을 마음대로 확대해 보며 시간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가슴을 졸인다. 곧 아이와 아빠가 올 시간이다. 집안을 청소하고 아이를 맞을 채비를 하며 익숙한 일과를 기다린다. 삐삐.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 앞으로 두 사람을 마중 나간다.
“우리 아기 잘 있었어? 엄마는 하루 종일 잠도 못 자고 우리 아기만 기다렸지.”
거짓말이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알아? 우리 예쁜이.”
이건 진심이다.
아이의 손발을 조물락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는다. 하루 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마음껏 느껴본다. 점심 때가 다 지난 시간, 오늘은 한 발 늦게 시작되는 돌봄의 하루. 보고 싶던 마음만큼 가득 차오른 만남의 기쁨. 얼마 못 가 돌봄의 고됨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가끔은 하던 일을 다 놓고 너를 바라보겠다고. 돌보는 사람만이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도 살겠다고. 눈앞의 아이를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