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작은 책은 작은 조각배

by 라일락

독립출판이라는 말에는 한 스푼의 감성과 반 스푼의 힙함이 묻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해보니 감성과 힙함보다 더 진하게 묻어 있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외로움.


글을 묶고, 매만지고, 보고 또 보며 글자를 솎고, 몇 번이고 들여다 본 글을 또 보면서 누군가에게 와닿을 것 같은 문장을 다시 골라내어 겉표지 곳곳에 두는 일. 그 일을 하면서 자주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 좋자고 이걸 하는 거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대가 없는 일을 위한 대가 치곤 너무 긴 밤을 들여 하고 있었다. 홀로 서서 책을 내는 일. 독립출판의 뜻은 사실 이것이었다.


책을 내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건 시작이었다. 내 책이 어떤 책인지, 왜 읽혀야 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제안서를 만들고, 서점에 차례로 입고메일을 썼다. 고양이가 있는 서점에는 고양이와 함께 편안한 하루 보내시라고, 섬에 있는 서점에는 그 섬에 갔던 추억을 썼다. 고작 메일 몇 통 보냈을 뿐인데, 마음을 많이 써버린 걸까. 메일을 보내고 나면 넋이 쏙 빠졌다.


대부분의 서점에서 답신이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쥐고 있다 진동음이 울리면 흠칫 놀라기를 몇 차례. 메일알림이 온 것을 알아차리면 흰 벽 앞으로 가서 심호흡을 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다. 정중한 거절메일. 잔뜩 올라갔던 어깨가 한 번에 내려앉는다. 그래도 답신이나마 보내준 것은 고마운 일. 감사의 메일을 보낸다.


틈이 나면 자꾸만 눕고 싶다.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마음은 온통 한 곳에 쓰고 있어, 자주 배가 고프고 힘이 빠진다. 누워서는 생각을 한다. ‘제목을 바꿀 걸 그랬나?’ ‘좀 산뜻한 이야기를 쓸 걸 그랬나?’ 생각은 혼자 저 멀리 나아가 대개는 이렇게 끝난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글을 나 좋자고 써버린 건 아닐까?’


근데 나는 좋긴 한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책이 인쇄소에서 오던 날, 책이 담긴 박스를 책상 옆에 가득 쌓고 나서 한 권을 빼어 들었다. 한 손엔 연필, 한 손엔 책을 들고 책상에 앉았다. 첫 글 첫 문장부터 빠뜨린 단어가 보였다. 휴, 깊은 한숨.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새 책에 줄을 죽죽 그으며 오타를 찾아냈다. 찾아낸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모두 붙이고 나서야 방에서 나왔다.


“책 나오니까 기분이 어때?”

방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묻는다.

“그냥, 속상해.”

전혀 생각지 않던 말을 듣고는 멈칫한다.

“뭐가?”

“모르겠어. 고칠 데가 너무 많아.”


그렇다. 나는 제대로 기뻐하지도 못했다. 책이 나왔다는 걸 알리기도 쑥스러워 카톡 프사를 책표지로 바꿨다가 바로 지워버렸다. 그 짧은 사이에 축하연락이 왔다. 아기의 친구 엄마였다.

“어머나. 작가님이신 줄 몰랐어요. 너무 축하해요!”

그날 하원시간에는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이고 어린이집에 갔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 걸. 상담시간에는 선생님에게 털어놓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날 텐데. 이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음… 수영을 해보면 쉴 새 없이 온몸을 움직여야 겨우 제자리에서 떠 있을 수 있잖아요?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냥 계속 가라앉는 것 같아요.”

그런가. 지금 있는 자리에라도 계속 있으려면 계속해서 발버둥을 쳐야 하는 건가. 나 여기 있다고, 여기 잘 살고 있다고 알려야 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기분은 영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달, J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미국에 살고 있는 그는 매년 여름에 한국에 온다. 그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여름이 오면 생각한다. ‘곧 J가 오겠구나!’ 하고. 글방에서 함께 글을 쓰던 그는 지난해에 책을 냈다.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내게 1년 만에 마주한 그는 말했다.

“정말 아무도 없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분명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꼭 기억해요.”


누군가는 기다린다는 말. 혼자여서 외롭고 어려울 때마다 그 말을 붙잡고 이 곳까지 왔다.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혼자라는 걸 알았을 때, 그 말이 또 내 앞에 선다. 서서는 자신의 등을 잡고 서라고 말해준다. 말의 다정함이 꼭 J를 닮았다.


세상이 이렇게나 넓은데, 누군가는 기다렸겠지. 꼭 이런 모양의 이야기를 기다려 왔을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어쩌면 독립출판을 하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혼자 책이라고 불릴 만한 무언가를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 저 멀리 기다릴 누군가에게 닿으려 혼자서 끊임없이 노를 젓는 걸지도. 내 작은 책은 작은 조각배. 타고 앉아 노를 저어 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