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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어줄까?

by 라일락

“에이, 그건 아니지.”

예상치 못한 한 마디에 나를 둘러싼 공간이 쪼그라든다. 다른 사람들의 말도 웅성거림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본가의 부엌 안. 이 공간의 벽과 천장, 바닥이 있는 대로 나를 조이는 기분. 발디딜 곳이 사라지기 전에 내가 사라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나를 뒷걸음질치게 한다.


슬리퍼를 신고 집을 뛰쳐나온다. 빠른 걸음으로 동네를 빙빙 돌다 남편과 아이를 그곳에 두고 나왔다는 걸 알아차린다. 난 이제 혼자가 아닌데… 혼자만 쏙 빠져 나오면 안 됐었는데… 생각하다 알아차린다. 도망 나온 내 옆의 빈 자리를. 아무도 없는 옆자리의 쓸쓸한 공기를.


도망을 치기 시작한 건 꽤 오래 전부터였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 단단한 공처럼 불현듯 가슴에 안기는 그 느낌을 견디지 못했다. 집에선 동네 골목길로, 학교에선 뒤뜰로 숨어들었다. 숨어선 쳇바퀴 돌듯 같은 곳을 돌고, 또 돌았다. 그렇게 나를 진정시켰다. 진정은 잘 되지 않았고, 매번 완벽히 준비되지 못한 채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한바탕 세수하고 나면 두 눈이 벌겠다.


그날도 비슷했다. 벌건 눈으로 화장실을 나온 딸을 엄마는 애써 모른 척했다.

“어디가 아파?”

“응? 그냥 좀 컨디션이 안 좋아.”

남편이 아이를 돌보고 있는 걸 확인한 후,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숨죽이고 있었다. 방 안에서 상담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가능하신 시간 중 가장 빠른 시간에 상담을 받고 싶다고.


이틀 후, 서울로 돌아와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동네를 돌며 쓴 휴대폰 메모를 읽었다.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조여드는 느낌. 갑갑함. 답답함.
눈물 날 것 같음. 세수하는 척 울기.
밖으로 도망침.
밖에서 혼자 계속 생각.
좀 가라앉으면 집에 들어감.
들어가서는 눈을 못 마주침.
괜찮은 척하려고 애씀.
알아봐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도망 갈 때 같이 있어주길 바라는 것 같음.


“옆에 있는 스탠드 스위치를 눌러 볼래요?”

선생님 말대로 스위치를 눌렀다. 누르자마자 조명이 켜졌다.

“엄청 빠르죠? 일락 씨 머리 안에도 이런 회로가 있어요. 매번 사용했던 회로라서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거죠.”

아마 생각할 새도 없이 빠르게 머릿속의 조명이 켜졌을 거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그랬다. 불난 집에서 뛰쳐 나오듯 매번 집에서 튕겨져 나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밖이었다.


“그런데요. 일락 씨가 달라졌네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요? 저는 남편이랑 아이까지 두고 집을 나온 걸요.”

“마지막 두 줄이요. 그게 엄청난 변화예요.”

혼자서 뛰쳐 나왔지만, 사실은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 뒤쫓아 나와주길 바랐다는 것. 내내 같은 곳을 돌고 또 돌면서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내 옆자리에서 같이 걸어줄 다른 누군가를.


“누가 와줬으면 했어요?”

“글쎄요…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 같아요.”

“어떤 말을 듣고 싶었어요?”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랬구나. 매번 많은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 혼자이기를 택했던 나는, 사실 외로웠구나. 아무도 물어주는 사람이 없어, 스스로 왜 그러냐고 물으면서 튀어 오른 감정을 삭혔던 거구나. 익숙한 나의 새로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일락 씨한테 도망은 자신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거예요. 불안한 상황에 자신을 계속 놓아둘 수 없으니, 그 공간에서 스스로를 빼낸 거죠. 참 잘했고, 고생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도망쳐도 돼요. 도망치더라도 내가 혼자 있고 싶어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는 것, 누구랑 같이 있고 싶어한다는 것만 잊지 마요.”

상담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면 남편과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은 선생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나를 만났는지, 눈물이 났다면 왜 눈물이 났는지.


그리고 며칠 전 잠들지 못하고 혼자 울고 있던 어느 날, 아이를 재운 남편이 나를 발견했다.

“옆에 있어줄까?”

“아니, 됐어. 괜찮아.”

물음을 듣자마자 대답했지만, 그는 잠자코 내 옆에 앉았다.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야기하면서 나는 더 크게 울었고, 그에게 이제 그만 가라고 화를 냈고, 그가 문을 닫고 난 후에도 여전히 울었지만 이 슬픔은 응어리가 되지 않고 눈처럼 녹아 없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아이 밥을 차렸다. 화장실 거울로 본 눈은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부어 있었지만, 전 날 걱정했던 것만큼 오늘이 두렵지는 않았다. 걱정했던 것만큼 끔찍한 하루를 보낸다고 해도, 그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또다시 무너진다 해도 그가 나를 찾아와 물어줄 것이다.

“옆에 있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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