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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Jan 28. 2023

카페모카


카페모카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1)"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내 나이는 21살이었다.


그때 나는, 애니메이션 전공을 하는 대학생이었는데,

영화를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더 좋아했었다(왜 애니과를 갔는지 모르겠다)


학교 도서관 DVD실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쭈그려 앉아 영화를 보곤 했다.


산골짜기 근처라 그런지, 겨울의 도서관은 굉장히 추웠다.

그래서 그런지, 그 넓은 도서관에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나 홀로, 학교 DVD실, 낡은 붉은색 소파에 앉았다.

은은하게 퍼지는 햇빛, 오래된 헤드셋, 덜컹거리는 모니터로 영화를 보았다.


가족의 탄생(2006)은 유독 여러 번 보았다.

문소리 배우와 공효진 배우는, 그 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되었다.


사실, 나는 김태용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하기 이전에, 교수님의 따뜻한 분위기, 가만히 위로해 주는 목소리, 그리고 학생들을 존중하는 마음씨를 좋아했었다.


그러하다. 나는 교수님의 제자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운이 좋게도 학교에 영화과가 신설이 되었는데, 그때 초빙교수로 김태용 감독님이 오시게 된 것이다. 그때 당시 "가족의 탄생(2006)"은 나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진 명작이었다. 이미 그 작품으로 인해 유명세를 갖고 계셨던 분이라, 김태용 감독님이 산골짜기 작은 학교에 온다는 소식이 돌자, 너도 나도 그의 수업을 들으려고 난리가 났다.


죽어도 그 수업은 꼭 듣고 싶었다.


악착같이 목숨을 걸고 수강신청 광클질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우스를 미친 듯이 누르는 것밖에는 없었지만,

간절함이 통했는지 치열했던 경쟁을 모두 뚫어버리고 감독님의 수업은 모조리 쟁취하였다.

그리고 자랑하나 하자면, 영화과 수업은 전부 A+를 받아 교내 유일하게 타전공을 부전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나는 도대체 왜 애니과에 갔는가?).


지금 돌이켜보면, 김태용 감독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영화에 대한 갈망이 더욱더 커져갔고,

26살, 서울의 한 영화과 편입에 성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태용 감독님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다.


33살인 지금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생기면 될 때까지 부딪히면서 살고 있다.

그때 광클절 하나로, 지금까지 죽지 않고 발버둥 치면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여하튼, 그렇게 김태용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영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수님의 만추(2011)라는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그 해 겨울에 들었다.

 

만추


스물한 살의 나는, 어둡고, 우울하고, 쓸쓸했다.

뭘 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왜 살아야 할지, 이런 풀리지 않는, 아주 짙은 고민들을 안고 살았었다(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영화"가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영화 속에는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모두 담겨있으니, 나는 가만히 그 감정에 스며들기만 하면 되었다. 현재의 고민은 잠시 잊고, 영화 속의 다양한 감정들에 몰입할 수 있어서, 영화를 너무나 사랑했다.


만추(2011)는 지금까지 한 세 번은 보았을 것이다. 첫 번 째는 대학 동기와 보았고, 두 번 째는, 혼자 극장에서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평범한 극장보다는 다른 곳에서 보고 싶었다.


카페모카, 만추


21살 추운 겨울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종로에 혼자 갔다.

종로의 한 소극장에서 만추(2011)가 상영되고 있었다.

낯선 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었고, 줄 지어 있는 골목들 사이의 간판들을 구경하면서 다녔다.


집에서 종로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집에서 가장 먼 곳에서 그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자마자 또 울어버렸다.

똑같은 영화를 세 번 보았는 데도, 여전히 나는 감동받고 있었다.


만추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감동받았을 수도 있고, 내가 알고 있는 교수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탕웨이의 쓸쓸한 마음이 그때 당시 불안한 삶을 살았던 나의 20대와 닮아서 있을 수도 있다.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마음을 추스르고 싶어서 극장 근처의 한 카페에 들어갔다.


따뜻한 카페모카를 시켰다.


하얗고 작은 머그잔 위에, 짙은 초콜릿 향이 퍼지고 있었고, 새하얀 생크림까지 위에 올려주셨다.

사실 커피맛을 잘 몰랐던 때라, 카페모카가 뭔지 잘 모르고 시켰던 것 같은데,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마시니 너무 맛있었다.

 

창 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생크림이 묻은 초콜릿 커피를 마시면서, 길을 걷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카페모카를 마시면서,

이상하게 귓가에서 카페에서 만추의 OST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카페모카는, 나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있다.


불안했던 나의 20대,

좋아했던 감독님의 따뜻한 영화,

낯선 길 위의 어색하게 서 있는 나,

그리고 카페모카.


나에게 카페모카는,

2011년의 만추다.




글 여미

커버사진 여미

yeoulhan@gmail.com

종로의 그 낯선 길은, 펭귄이랑 다시 한번 꼭 가봐야겠다.


카페모카, 만추!



전 항상 김태용 감독님의 작품을 기다립니다.

(전 졸업작품을 마지막으로 은퇴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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