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하지 마세요
결론적으로 취준을 시작했다. 그런데 명확히 따지면 취준이라기보다는 '인준', 즉 인생준비를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여행에서 겪은 일이다.
한 달간의 동남아 일주에서 즐거웠던 기억도 기억이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고생한 추억들이다. 그중에서도 [태국 치앙라이->라오스 루앙프라방] 구간의 메콩강 1박 2일 슬로우 보트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 여행기에서 풀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통해 나를 찾는 방법을 발견했다.
아, 잃어버렸던 나를 찾았다는 말이 아니다. 나를 찾는 방법을 찾았다는 얘기다.
그건 바로 '왜'라는 질문과 '인정'이라는 대답이었다. 그간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명쾌한 답을 찾고자 했다. 불안한 마음을 잊기 위해 그게 뭐든지 간에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다가 팽팽한 고무줄이 끊겨버리듯 번아웃기간을 겪고. 그렇지만 그건 임시방편이었을 뿐, 불안감은 저 깊은 마음속에서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1박 2일 동안 슬로우 보트에서 끝없는 메콩강 풍경을 바라보며 든 생각은 어이없게도 명쾌했다.
? 이게 무슨 말이야. 불안한 거 몰랐어?
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인정 뒤편에는 '왜'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무수한 답변들이 녹아져 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 '루앙프라방 여행하려고'
'왜 여행 온 거야?' - '나를 찾으려고지'
'왜 나를 찾으려는 거야?' - '내가 나 같지가 않아'
'왜 나 같지가 않은 거야?' - '글쎄, 똑같은 하루여도 계속 불안한 마음이야'
'왜 불안한데?' -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 모르겠어?' -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앞으로도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야'
...
왜라는 질문을 던지니 뒷모습만 봐왔던 '불안한 마음'의 앞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고민의 결과, 불안함은 결국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치열하게 노력해 왔기에 느낄 수 있는 선물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라는 대로만 살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살았다면 불안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기에 불안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불안감을 즐길 수 있는 경지까지 올라섰다.
여행 이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취업 준비를 해야 함도 마찬가지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불안감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마음이 평화로우니 결정을 내려도 여러 가지를 함께 고려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취업 준비에는 영어 고득점이 필요한데 29살이나 먹어놓고 영어 성적 하나 없네. 너 지금까지 뭐 했냐?'
라는 자책에서
'이번 여행에서 전 세계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내 영어 실력이 더 좋았으면 어땠을까 싶네. 근데 어차피 취업 준비를 하려면 일단 만료된 영어 성적도 필요하니깐... 정형화된 토익보다는 회화에 그나마 도움이 되는 '오픽(OPic)'을 준비해 봐야겠다. 이왕 하는 거 전화영어도 해봐야지'
라는 작지만 의미있는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지난번에 넣은 자소서가 광탈했는데, 내 스펙은 거들떠도 안 보나보다. 자소서 어떻게 고쳐야 하지? 아휴.'
에서
'나는 콘텐츠 기획이 좋은데, 앞으로 내 커리어는 어떻게 발전시켜가야 할까? 그걸 잘하려면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들을 잘 정리해 봐야겠다. 맡았던 업무와 성과, 실패했던 경험, 내 생각을 정리해야지. 어차피 자소서도 써야 하니 자소서 방식으로도 써봐야겠다.'
로 달라진 것이다.
영어성적을 따고, 자소서를 쓰는 것. 하지만 그 행위까지 다다르는 과정은 완전히 다르다. 결과를 대하는 마음의 품도 넓어졌다. 영어 성적을 따야 해서, 자소서를 써야 해서가 아니라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내 커리어를 정리하고 싶어서 이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더 열심히 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이렇게 단순히 '취업'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인생'을 준비하게 된다.
우리나라 나이 제도가 만 나이로 바뀐다고 한다. 1살이 주는 체감은 엄청나다. 30살에서 29살이 되면 어떨까. 마치 1년이라는 시간이 더 주어진 것 같다. 사실 흘러가는 시간은 똑같은데. 시간의 소중함이란 이렇게 지나가서야 알게 된다. 내게 다신 오지 않을 시간을 '취업'이라는 무생물을 위해 낭비하지 말아야지. 살아 꿈틀대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안달나있는 팔팔한 '인생'을 준비해야지. 29살의 1월은 이렇게 시작한다.
Youtube 『차감성의 2022년 365일, 매일 1초씩 촬영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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