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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Jul 30. 2017

[The God Delusion] Chapter.1

만일 칼융이 아인슈타인을 만났다면, 겁많은 종교인과 오만한 계몽주의자

※긴 패시지(passage)와 논리적인 구성을 요구하는 소논문 등의 작성을 목적으로 작성된 글이 아닙니다. 개인의 독서기록물에 불과합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오늘에서야 그 책의 Paperback Version 인 [The God Delusion]을 구매했으니, 번역서에서 원서로 옮기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페이퍼백 버젼을 위한 서문부터 기존의 서문, Chapter.1에 이르기까지, 처음 번역서를 읽었을 때부터 시간은 흘렀지만 그 때 느꼈던 감동과 기분좋은 경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에 의문을 가졌던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소녀가 철학을 전공한 뒤에 읽은 책은 번역서와 원서의 차이에서 비롯된 특성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내용상의 감회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오늘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차마 갖지 못했던, 그가 Chapter.1 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아인슈타인의 종교적 사상에 근거하여 적은 짧은 단상들을 소개한다. 





 언제나 나는 미스틱한 존재에 대한 신뢰와 미스티컬한 감각에 대해서 어떻게 구분을 지어야 할 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그 대답을 아인슈타인의 종교에 대한 대답에서 들을 수 있었다. 


 I have never imputed to Nature a purpose or a goal, or anything that could be understood as anthropomorphic(의인관). What I see in Nature is a magnificent structure that we can comprehend only very imperfectly, and that must fill a thinking person with a feeling of humility. This is a genuinely religious feeling that has nothing to do with mysticism.


 만일 그의 의견에 내가 동의할 수 있다면, 나는 '신'이란 존재를 믿는 종교에 의문을 갖는 동시에 '완전한 계몽'이란 또 다른 종교에 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나의 태도를 보다 공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전공했을 때부터 나는 '완전한 계몽'이란 인간 이성의 오만을 드러내고, 과학의 절대주의를 신봉하는, 그러므로 인류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채 종결되는 운명을 지닌 그럴 듯한 사상이라고 믿어왔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란 과학자의 겸손한 고백에 비추어봤을 때,- 그것은 내가 칸트가 주창한 '숭고' 개념에 대해서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종류의 감각을 개인적으로 경험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대자연의 널찍한 품 앞에서 일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되는 듯한 감각과 자연의 관점 하에 새롭게 드러내는 우리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존재의 크기 앞에 겸손함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완전한 계몽이란 이름의, 외부 세계를 향한 정복을 목적으로 가진 인간중심적 사상은 프랑스 혁명 당시 활동했던 레지스탕스처럼 원대한 이상을 지니되, 치기 어리고, 불손하며, 인식 및 감각의 유한성이란 독재자 앞에서 맥을 못추는 한 무리 집단의 Delusion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이면에 법칙law과 구성structure이 존재해야 해당 존재자의 존재 자체가 가능하다면,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형이상학'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반면, 누군가는 그것을 '오로지 회의주의만으로 물리칠 수 있는 또 다른 종교'라고 부르는 것에 상관없이- 모든 증거가 그것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드러날 때, 그러한 전제를 나는 받아들일 용의가 충분히 있다. 이 때, 이러한 논증의 결론은 '존재라는 현상 그 자체를 가능케하는 일정한 규칙이 그 이면에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명제가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 즉 개별적인 모든 현상을 가능케하기 위해선 그것의 존재를 결정짓는 규칙이 존재해야 한다라는 당위적인 명제를 의미한다. 


 If something is in me which can be called religious then it is the unbounded admiration for the structure of the world so far as our science can reveal it. 


 아인슈타인의 이같은 문장은 또 다시 나를 감동케한다. 위의 문장에서 그는 세계의 모든 현상이 과학으로서 설명될 수 있고, 그럼으로서 인간 이성에 의해서 정복을 당할 수 있다는 낡은 계몽주의를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경이는 과학이 드러내는 '한' 가능하다, 라는 전제를 가정함으로서 자기가 세계에 대해서 갖고 있는 경이는 결코 초월적인 존재자를 향한 게 아님을 설명하는 근거로서 이 세계가 갖고 있는 일말의 규칙에 대해서 언급하는 동시에 과학보다 이 세계가 보다 거대한 존재라고 믿는 그의 신념을 드러낸다. 즉, 그의 시선에서 이 세계는 과학적 법칙의 수하에 놓인 게 아니라, -그 모든 독일 출생 관념론자들이 두려워했듯이- 그 위에 놓인 것이었으며, 과학은 아래에서 위로 그것을 규명해나가야 하는 모험가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었다.


 미상불 과학이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배의 키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은 인격을 갖춘 신이 존재한다는 것만큼 경악스러울 정도로 순진하다. 두 가지의 주장에는 묘한 종류의 공통점마저 있는 데, 우선 과학과 신이 모두 이 세계의 위에 올라서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의 이성의 안내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과학이 세계를 정복하는 시대가 두렵지 않다. 그러나 과학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대를 막기 위해선 교회 앞에서 십자가는 그저 아래 쪽이 보다 긴 '더하기' 모양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에 버금가는 "Blasphemy"를 저지를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이 세계를 받치고 있는 보편적 혹은 초월적인 성질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과학이 어두운 하늘 아래 저 홀로 빛나는 달을 보면서 오래 전, 늑대가 언덕 위에서 울부짖던 시대와 교감하는 순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이 청명한 하늘 아래 노니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설령 그 이면에 어떤 종류의 규칙이 숨어있을 지언정 그 발생의 순간에는 철저하게 우연만이 존재할 행성이, -규칙의 탄생에도 우연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규칙이 존재했을 지언정 '하필' 그 안에서 태어난 인간의 시선에서 '아름답다'라는 판단을 갖출만한 대상으로서 존재를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어떻게 과학이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 계몽주의와 유신론은 모두 인간의 오만과 겁에 의해서 탄생한 괴물에 불과하다. 오로지 계몽이란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과학이란 전차를, 그 쓰임새에 대한 목적과 범위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무작정 질주시키는 것은 말을 쉴 새 없이 혹사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 경우, 말은 인류의 이성을 비유한다. 





 만일 칼융이 유사한 시기에 태어난 아인슈타인과 친분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가 자서전에 적었던 어린시절의 상상을 했던 순간을 그에게 고백할 수 있었더라면, 죽기 전에 그는 얼마나 자신의 상상 그 자체에 대해서 용서를 빌고 싶고, 마주볼 용기가 없을만큼 두려워했는 지 자서전의 형태로 적어내려갈 기회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아인슈타인이라면, '당신의 염려와 달리, 교회 위로 한 무더기의 똥이 내리는 것은 발칙하고, 창의적인, 그러므로 어린 아이다운 상상에 불과하며, 존재하지 않는 신의 성질을 모독한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는... ...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대답을 해줄 수도 있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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