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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May 19. 2019

젠더리스, 감시와 처벌을 넘어서

태민의 'MOVE'로 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본 에세이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 태민의 'MOVE'의 저항적 이미지로 구현된 메세지의 비판적 재구성을 시도한다. 이성애 중심적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기존의 권력을 대체한 중산층이 '감시'와 '처벌'이라는 기제를 통해서 인간을 통제하는 것을 주장했던 푸코의 철학을 기반으로 태민의 뮤직비디오의 재해석을 통해서 '비정상적' 젠더로 규정된 그가 저항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태민의 MOVE는 CCTV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감시와 처벌을 위해서 탄생한 CCTV는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 사용한다. 마치 누군가 태민만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CCTV는 어지럽게 촬영된 태민의 이미지를 빠른 속도로 나열한다. 



초록색과 흰색, 검은색 등 제한된 색깔의 표현을 통해서 단조롭게 정리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위에서' 누군가는 내려다보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감시 대상을 처벌하기 위한 움직임이 수직적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 통제를 위한 관리가 사회 전체를 향해서 가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태민이 MOVE의 뮤직비디오의 주 배경 장소로 '쓰레기차가 있을 법한 뒷골목'을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한다. 성적 지향성과 성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리고 태민이 표현하는 '젠더리스'는 생물학적 성별에 걸맞는 사회적 행동과 문화적 허용범위 내에서 길들여질 것을 요구하는 '비정상적 인간의 범주'를 직설적으로 은유하는 것을 시도한다. 만일 그의 성적 정체성이 '여성과 남성',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거나, 모든 것에 속한다면, 그의 성적 지향성도 마찬가지로 자유로울 것이다. 쓰레기차가 있을 법한 뒷골목은, 우리 사회가 통제하길 거부하거나 고의로 소외시킨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퀴어인의 터를 상징한다. 이성애자와 달리,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 '길'을 모색해야 하거나, 강간을 당해도 신고할 수 없었던 동성애자들이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온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다. 한편, 이곳은 은유적으로 '젠더에 관련되어, 소외된 모든 이'를 상징하는 곳일 수 있다. 



 

 후속작인 WANT와 마찬가지로, 태민의 MOVE는 뮤직비디오 속 주인공의 공연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단, WANT에서 태민이 존재론적 갈등에 필연적인 고뇌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저항의 움직임을 표현했다면, -그러므로, '공연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성격과 화해를 했다면- MOVE에서의 태민은 'CCTV'의 존재를 몰라야 하는 그 무언가로 설정된다. 자동차의 뒷좌석에서 그를 바라보는 듯한 구도를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다. 본인의 성적정체성을 근거로 존재 그 자체로 처벌되기 위해서 태민은 '감시'되고 있지만, 그것을 몰라야 하는 일반 대중을 의미한다. 본인의 성적정체성/성적지향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이들이 매 순간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하며 감시를 당하는 듯한 느낌을 표현하기에 이는 적절한 시선이다. 하지만, 동시에 '젠더'와 관련되어 심각한 강도의 외/내적 갈등을 의식하지 않는 대부분의 대중을 향해서 '너희들이 실은 감시되고 있으며, 스스로 '정체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사회가 통제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메세지를 던지기에도 충분하다. 



가장 뮤직비디오에서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는 장면이다. 태민의 MOVE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비의 이미지'다. 후속작 WANT를 해석하며, 태민은 '물'을 자유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장면에서 태민은 카메라 구도 상 천장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닥에 누워있다. 즉, 화면의 방향상 아래로 하강하는 비는 실은 '상승하고 있다.' 그리고 전복된 세계 속에서 태민은 바닥에 누운 채로 자신을 향해서 멀어지는 빗방울을 향해 손을 뻗는다. 마치 '닿을 수 없는 것', 즉 이상향을 향해서 아련하게 손을 뻗는 것처럼. 


 이 장면에서 태민은 절망스럽게 바닥에 누운 채로 자유를 갈망하는 퀴어인들을 상징한다. 완전하게 전복된 세계에서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비는 어디로 향하는가?



 바로 태민의 이상향, 쓰레기차가 버려질 법한 뒷골목을 향해서 떨어진다. 방금 전, 태민이 누운 장면에서 상승하는 비는 반대편에서 적극적으로 저항의 몸짓을 구현하는 태민을 향해서 하강한다. 즉, 비는 일직선으로 태민의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맡는다. 혹은, '전복된 땅의 이미지'를 통해서 단순히 태민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의 '정반대임'을 드러내서 관객으로 하여금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느끼게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천장에 붙은 바닥에 누운 채로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서 손을 뻗는 태민의 장면에서 비는 '원래 가야 할 길과 반대방향'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태민은 뒷골목에서 비를 맞은 채로 저항의 움직임을 이어간다.



그리고 태민은 '붉은 조명' 속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붉은 조명에 대한 해석은 WANT와 동일하다.) 



 WANT에도 등장했던 '보석이 박힌 가면'은 태민의 얼굴 전체를 감싼다. 인물 전체가 카메라를 직면하는 이 장면은 관객에게 매우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되, 정체를 알 수 없게 얼굴을 가리고 있다. 공격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노려보는 인물들은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 이 사회가 지워버린 퀴어적 존재'를 상징한다. 혹은, 이 사회의 감시와 처벌을 피해서 스스로의 얼굴을 지울 수 밖에 없었던 퀴어인들의 사회적 위치를 표현한다. 그 중, 태민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서 관음되는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의 젠더리스 정체성을 상징하는 '보석 가면'을 착용한다. WANT에서 설명했듯, 보석 가면은 폐쇄시키는 면적이 넓을수록 관음의 대상, 즉 착용한 당사자에게 매우 답답하고, 관음하는 주체에겐 아름다워 보인다. WANT의 가면이 눈을 제외한 곳을 가렸다면, MOVE는 어떻게도 빠져나갈 수 없을만큼 얼굴 전체를 가려버린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태민은 스스로의 정체성이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을 아는만큼, 인간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얼굴을 가리는 데 필사적이다. 그러나 마치 가요무대의 엔딩처럼 잘 짜여진 구도 속의 중심에 선 그는 관음하는 주체에게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참고로, 이 순간, 태민의 가면을 벗은 얼굴이 교차로 편집된다. 이 때, 가사는 '잠시 난 모든 것을 "지워" 시각에만 의존해.'  감시와 처벌의 기제에 스스로의 얼굴을 드러내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태민의 표정은 이 사회의 '이성애 중심적 사고관'을 지닌 감시자를 향해서 '이제 뭘 어떻게 할거냐,'고 묻듯 도발적이다. 



'MOVE'라는 메세지가 덕지덕지 붙은 '버려진 뒷골목'에서 태민은 코하루와 조우한다. 각자 생물학적 여성이되 사회적 여성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고, 생물학적 남성이되 사회적 남성의 정체성에 부합하길 거부하는 이들은 태민의 정체성에 내재된 양성의 페르소나의 조우를 의미한다. 혹은 태민으로 하여금 MOVE의 서사 속에서 '저항의 움직임'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증폭제 역할을 하는 '그 무언가' -태민의 등 뒤에 선 또 다른 퀴어적 존재들-을 상징한다. 이는 코하루와 태민의 듀오 퍼포먼스만을 담은 #3 MOVE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등 뒤에 '진입금지'를 상징하는 철조망과 붉은색 벽돌벽은 이들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비교적 색채감이 있는 의상을 입은 것과 달리, 코하루는 철저하게 존재를 숨기는 '검은색 의상'을 입고 태민의 등 뒤에 서 있다. 두 사람은 정확하게 똑같은 춤을 춘다. 검은색의 '사회적 여성성을 통해서 정의되길 거부하는 생물학적 여성'은 말없이 카메라를 노려볼 뿐이다. 그녀는 노래를 하는 태민의 뒤에서 숨죽인 채 그와 동일한 춤을 춘다. 과연 누가 누구의 춤을 따라서 추는 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태민의 그림자'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태민에게 '검은색으로 가려질 필요가 있는 생물학적 여성의 페르소나'가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대답은 정확하게 MOVE가 표현하는 '감시와 처벌'의 문제로 귀결된다. 



태민의 MOVE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소재 중 하나는 '붉은색 조명'이다. 신호등의 붉은색 조명은 '정지 신호'를 의미한다. 모든 것이 태민에게 '이 이상 넘어오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아마도 CCTV를 통해서 그를 체계적으로 감시하고 있었던 그 주체일 것이다. 붉은색 '정지 신호'로 둘러쌓인 태민은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퀴어 인권의 열악함을 상징하는 쓰레기차와 그를 감시하는 이가 뒷좌석에 누워있는 차로 만들어진 길고, 비좁은 통로를 태민은 도발적인 의상을 입고 걸어간다. 전통적으로 '남성성'이라 규정된 의상을 입지 않은 채 태연하게 길을 걸어가는 태민은 위태로워보인다. 우선, 그가 걷고 있는 길의 넓이가 지나치게 좁다. 그리고 정확히 카메라를 직면한 채 일직선으로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역적인 행위처럼 느껴질 여지가 있다. 정확히 이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 태민이 걷고 있는 다리가 다수의 길과 수직을 향해서 교차되는 길임을 뮤직비디오는 보여준다. -즉, 태민이 걷고 있는 길은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이다.- 심지어 화면의 바깥에 뻗어나간 바람에 '보이지 않는 길의 양극단'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길의 정체에 대해서 질문하게 만든다. 


 도대체 지금 그는 어디를 향해서 걷고 있는가? 


 긴 다리의 시작점, 그가 지나온 길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왜 그는 아무도 걷지 않는 길, 너무나 좁고, 위협적일만큼 경고의 메세지를 던지는 '일직선'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너무나 분명하게 다른 사람의 길과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그 길을?


  등 뒤에 걸어온 길은 있고, 눈 앞에 걸어가야 할 길은 남아있다. 그러나 어디서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는 상황, 태민은 특유의 여유롭게 저항하는 자세로 관객을 희롱하듯 카메라를 직면한 채 조심스레 그 길을 걸어간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구도 탓에 관객은 헬기에 탄 채 그를 아슬아슬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긴장을 느낀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걷는 길은 다른 방향을 향하는 길들보다 '우위에' 서 있다.- 과연 관객이 그가 다리 위에서 무엇을 할 지, 그 다리를 건널 지 예상하는 그 순간, 



마치 태민은 겁을 주듯 위협적으로 날갯짓을 가장한 주먹을 휘두른다. 하반신은 고정시킨 채 상반신만 앞으로 급작스럽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를 지켜보던 관객은 위태로움을 넘어서 '위협'을 느끼게 된다. 마치 그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내가 이렇게 하면 (네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듯한 제스쳐에 관객은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카메라는 관객의 심리적 거리감을 표현하듯 태민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진다. 완전히 다리를 건너지 않은 채 관객을 향해서 공격적인 움직임을 표현한 태민은 끝까지 카메라 너머의 관객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다. 마치 관객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본인의 도발적인 저항의 자세에 도취한 것처럼.




이윽고 태민의 육체는 어그러진다. 경계가 허물어진 육체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시도하거나, 혹은 신체에 내재화된 감시와 처벌의 기제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육체 중심의 성별에 제한된 정체성을 '춤'이라는 형태의 가장 역동적이고, 본능적인 동작을 통해서 그는 탐구한다. 일련의 과정에서 그의 육체는 착시 거울에 비춰보듯 허물어진다. 마치 그의 육체 속에 잠들어있던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예비하는 것처럼. 가장 극렬한 형태의 저항의 기제는 그의 육체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생물학적 남성으로서 몸'에 대해서 그는 경계를 흐뜨리면서 질문을 던진다.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장면, CCTV는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CCTV의 성질이 다르다. 더 이상 감시와 처벌을 위해서 통제의 대상으로 기능하던 태민은 없다. 거의 보일락말락 하는 수준의 태민은 CCTV에 오류가 생기기 무섭게 그가 걸어온 방향을 향해서 나아간 것을 보여주듯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화면의 경계 너머로 인물이 탈출하는 것은 그가 이미지의 레이어로 쌓아온 긴장에서 벗어나 관객으로 하여금 허무한 자유를 느끼게 한다. 본인의 성적정체성을 근거로 이 사회의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에서 스스로 벗어난 태민의 자취도 '통제 대상이 없는 영역의 허무함'만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해당 뮤직비디오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구성'에 저항하며, 이성애 중심적 사고방식을 통해서 정상의 범주를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빅 브라더'를 향한 저항의 메세지를 표현한다. 기존의 왕권 중심 권력을 대체한 새로운 권력 계층인 부르주아가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서 보다 새로운 형태의 감시 제도를 이용하여 이성애 중심적 사고관이 개인의 정체성에서 확립시키고, 비이성애를 배제시키면서 강화된 중산층의 사회적 권력을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역설한다. 노동자의 궁극적 자유를 실현시킬 유일한 터로서 공산주의 선언문에서 본인이 직접 지정한 독일의 철학자, 칼 막스에게 영향을 받은 프랑스 철학자는 자본주의의 체제 하에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중산층이 기존 왕권과 다른 이익 관계를 갖고 노동자 및 일반 대중을 대하는 것을 주장하는 한편, 바로 그 자본주의 체제 하에 동성애자 및 퀴어 인권에 대한 체계적인 배척이 이뤄졌다고 표현한다. 기존의 전근대적 야만스러운 처벌 방식이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서, '그 행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행위의 유무만이 처벌의 근거였다면, 부르주아적 감성이 노동자를 지배하는 근대의 처벌 방식은 그 인간의 정체성을 주목하는 것은 산업혁명 등장 이후 자본의 판도가 달라지면서 변화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듯 '그 행위를 할 만한 인간인가, 아닌가'를 분석하여 일반 시민의 시야로부터 차단된 공간에 죄수를 위한 공간을 예비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생하는 처벌 방식을 대중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고, 스스로의 행위가 아닌 '정체성' 그 자체를 자기 자신이 검열하게 만든 중산층의 독특한 지배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왕권 체제와 달리 절대적인 권력을 누릴 수 없는 이들, 언제나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사회적 위치가 변동될 수 있고, 위협적인 다수의 노동자로부터 권력을 전복당할 수 있기에 모호한 지점을 차지한 권력층에게 행위에 대한 처벌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스스로 검열의 기준을 내재화하고, 권력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법관, 자본가, 교육가 등 중산층에 입장에선, '이성애 중심적 사고관'과 '가부장제' 등 이중적 사고관의 분리를 통해서 "비정상적" 퀴어존재와 여성에게 기득권에 걸맞는 인간으로 훈육시키는 것이 통제에 유리하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폐해는 사회적 안정을 꾀한다는 미명 하에 여성을 경제적인 분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척시킨 결과를 낳기도 한다. 즉, 산업혁명 이후 전복된 권력 체제 하에서 중산층은 기득권을 장기간 지속시키기 위해서 '여성'에게 다양한 정체성을 갖는 것을 포기하고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남성 권력에 순종하길 교육했고, '퀴어인'에게 시민을 재생산하지 않고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사회적 에이전시를 통해서 총제적으로 차별하면서 본인의 성적지향성을 처벌의 대상으로 감지하게끔, '언제나 "아웃팅"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존재'로서 길들인 것이다. 


 그러나 푸코의 철학은 거대 사회를 향한 저항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한 '폐쇄의 철학'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를 이해하고 깨어난 인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찾기를 촉구하는 '자유의 철학'이다. 마치 그 철학을 고스란히 표현하듯 태민은 CCTV 밖으로 나간다. 만일 'MOVE'에 푸코의 철학과 연결시킬 사전적 의미가 있다면 그것을 누군가를 감동시킨다는 것, 혹은 (저항의) 움직임, 움직이라는 명령, 그 총체적인 저항의 메세지에 관련된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의 구성원에는 지금 이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는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방금 전까지 그를 관찰하고 있던 이들이 바로 이 사회의 중산층의 입맛에 잘 길들여진 노동자 계층의 '빅브라더'인 셈이다. 바로 그 모든 것을 내버려둔 채 태민은 CCTV의 경계 너머로 사라진다.




'움직이라'는 명령을 남겨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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