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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Sep 17. 2019

하루키는 존재에 대해서 쓴다 1

당신이 몰랐던 하루키에 대하여 

    내 인생에는 '이 세상을 떠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남자가 두명 있다. 바로, 스티븐 킹과 무라카미 하루키다. 고등학생 땐 진심으로 샤워를 하다가도, 밤에 산책을 하다가도, 하루키가 이 세상을 떠날까봐 공포에 질리곤 했다. 하루키가 나의 현실에서 사라지면, 그가 나에게 일러줬던 존재에 대한 영롱한 감각과 환상에 대한 구체화된 시각도 나를 떠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가 이 세상을 떠나도 나에게 그를 기억할 수단을 만들기 위해서. 직접 나는 공책과 연필을 들고 내가 아는 하루키, 내가 분석한 하루키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로그에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던 2013년도부터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다시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기 위해서 키보드 앞에 앉았다. 과연 일문학도 공부하지 않은 내가 하루키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에 대해서 많고, 적은, 늙고, 젊은 꼰대들이 걱정이 많을 줄 안다. 그러나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하루키 세계를 '아마추어' 수준에서 심도있게 분석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부한다. 왜냐하면, 문학 께나 공부했다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자랑으로 삼는 그 멍청하고, 늙은 중년 남자들과 달리 하루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요즘 젊은 여자애'인 나에게는 전자가 갖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 나로 하여금 하루키의 작품 세계에 침을 바르듯 샅샅이 뒤졌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철학과 예술, 문학을 전공했다. 혹시나 싶어서 밝혀둔다.)


    이번 글은 순수하게 나의 재미를 위해서, 하루키를 기억할 수 있는 나만의 '추억 번데기'를 만들기 위해서 작성한다. -아무튼, 하루키는 영원히 나를 알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하는 건, 하루키를 공부한 이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존재의 경계를 뛰어넘어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는 일이 사랑이라면, 한국어로 일문학에 대해서 작성하는 나는 지금 그것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같은 결정을 태풍 때문에 10시간이나 지체된 공항에서, 언젠가 그가 소설 속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밝혔던 '공항은 질색이다.'는 표현에 뒤늦게 공감했던 내가, 해리포터의 마지막 권을 자면서 도둑맞은 바람에 공항 서점에서 하릴없이 새로 구매해야 했던 'Men without Women' 이라는 단편 소설을 읽으며 결정했다. 바로 이 소설이라면, 나는 하루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1Q84이후에 그의 작품에 반복되는 도형적인 패턴에 심한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마치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별안간 이혼을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이별이 아니라, 이혼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오랜만에 출간한 단편소설인 'Men without Women'은 가히 철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을만큼 존재에 대한 우화로 가득했다. 이것을 하루키 특유의 신선한 문체와 더불어 감각있는 서사를 통해서 드러낸 게... ... 


    그냥, 첫화부터 시작해보자. 






1. 내 차를 운전해Drive my car


    인간은 현실적인 요구에 의해서 타인에게 의존한다. 그리고, 바로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한다. 제 아무리 사회와 유리된 것처럼 보일 지언정 관계 속의 존재로서 등장하는 스스로를 새삼스레 발견하는 것은 하루키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인물의 유형이다. '내 차를 운전해'는 사사로운 이유로 운전사를 고용하게 된 중년 남배우가 유난히 말수가 적은 여성 운전자를 만나서 마주보게 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키의 단편이 늘 그렇듯, 서사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대화 속의 사건을 독백하는 것으로 흘러간다. 그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나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발화하는 순간, 나의 현재에 새롭게 덧입혀지는 존재의 의미를 인물이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메타포로 가득차있다. 하루키는 감독이 관객이 알아차리길 기대하며 그들의 시야에 구석에 미쟝센을 조심스레 밀어넣듯 이야기 전반에 색깔없는 메타포를 시도때도 없이 삽입한다. 


"It appears that I have a blind spot. On the right side, in the corner. I had no idea."

"내 시각에 맹점이 있었나봐. 오른쪽 구석에 말이야. 전혀 몰랐어."


    이를테면, 이것은 카후쿠가 아내의 불륜을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그는 화자의 질병으로 은유한다. -혹은, 그곳에 그도 알지 못했던 불륜의 이유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오직 아내만을 사랑했던 카후쿠는 끝내 불륜의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한채 아내를 지병으로 떠나보낸다. 카후쿠는 아내가 떠난 후에도 그녀의 곁에서 했던 질문을 되풀이한다. 도대체 왜 그들의 '완벽한 결혼'에 다른 존재가 필요했을까? 과연 어디에 그 불완전성을 야기하는 빈틈이 있었을까? 왜, 완성된 존재로서 그들은 함께 할 수 없었을까? 타인과의 결합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없는 운전사 미사키의 관계에서 그 해답을 은연중에 느낀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결합이라는 것은 없다. 오로지 같은 공간 안에 편안하게 존재하는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선다고 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운전사가 전두지휘하는 자동차처럼, 그들은 제멋대로 차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내릴 때가 된 사람을 뒤늦게 붙잡는다고 해결될 일이 어디있겠는가?


    어쩌다 같은 차에 타게 된 두 사람, 놀랄만큼 잘 어우러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곳에는 끝이 있다. 존재는 타인으로부터 완성되는 게 아니고, 타인과의 결합은 그 자체로 존재를 완성시킬만큼 완벽하지 않다. 처음부터 금이 간 결합에서 원인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부질없다. 아마도 그것이 카후쿠가 아내와 바람폈던 남자와 친구가 되는 것을 관둔 이유다. 그리고, 그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가누지 못하듯 통제할 수 없이 흘러가는 삶에서 '완성된 무언가'로서 기능할 수 없는 이유다. 그는 배우로서 다른 인물을 연기할 때도 완벽하지 않고, -이미 그는 그 자신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므로.- 그는 자기 자신으로 있을 때도 스스로 연기한 인물과 자기 자신을 헷갈린다. 그것은 존재의 튠tune을 맞추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고군분투하는 인류의 정신 세계를 드러낸다.  




2. 어제Yesterday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타인의 성질을 스스로 입는 것은 두번째 단편인 '어제'로 이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티븐 킹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가 해변의 카프카에서 '이곳에는 스티븐 킹같은 최신작은 없어.' 라고 발언한 것과 1Q84의 구성이 놀랄 만큼 킹의 추격전을 닮은 것, 그리고 가상과 현실, 환상과 존재에 대한 경계를 흐뜨리기 위해서 현실적인 차원의 문제를 가진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비슷하다.) 그리고 Yesterday는 거의 자가복제에 가까운 '어린 시절 첫사랑'과 '그 첫사랑과 친구가 이어지고',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롭게 성장한 친구가 욕조에서 노래를 부르고', '(천편인률적인 하루키 소설의 캐릭터인) '나'는 그 친구의 집에 찾아가고', '노래나 시를 엉터리로 읊는 것'등 이미 수없이 되풀이된 소재를 지닌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이것을 어떻게 재해석하는가? 또 다시 독자는 너무도 미묘한 각도의 차이로 인해서 전혀 다른 철학관을 지닐만큼 독특한 존재론적 특성이 바로 이 단편소설에서 어떻게 발전하는가, 를 봐야 한다. 


    Yesterday 어제는

    Is two days before tomorrow 내일이 되기 이틀 전

    The day after two days ago. 그리고, 이틀 전의 다음날. 


    하루키가 종종 단편소설에 의아한 시구를 적는 것은 존재를 대하는 인물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어제 내 인생을 괴롭히는 문제들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지.)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극도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지향하는 키타루는 간사이 지방 사투리를 고의로 익혀서 사용하는 도쿄인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간사이 출신이지만 도쿄 억양을 사용하는 '타니무라'라는 '내'가 있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의 대조는 그동안 하루키가 장/단편 소설에서 끊임없이 사용해온 '대비되는 데칼코마니' 형식으로 구성된다. 분명히 닮은 점은 있지만, 그것을 겹쳐보면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들이다. 이것은 존재의 당위성을 구현하기 위해서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 중 하나다. 나는 존재한다. 어떻게 존재하는가? 비완성된 형태로서 나와 또 다른 대비를 이루는 짝을 만나는 것으로 존재한다. '나라는 존재의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타인을 빌리는 것은 하루키 작품세계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어제'는 구태여 자신의 존재를 왜곡해서 삶을 이해하기 위한 이들의 먼 여정을 그린다. 그들은 눈 앞의 답을 무시하고, 직선 대신 곡선의 방향을 선택한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하루키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요구하고, 이따금 존재의 바탕을 채우기 위해서 나 아닌 것을 갈망하는 스스로가 싫어서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인간 삶의 양태는 하루키가 보여주는 실존의 한계고, 이것은 때때로 가상과 현실의 고의적인 중첩 내지 왜곡 등을 통해서 보다 극대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지나치게 완벽한 커플의 이해할 수 없는 비틀림' 은 하루키 작품세계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왜곡 중 하나다. 언뜻 겉에서 봤을때 잘 어울리는 한쌍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어지지 못한 채, 그 연결의 몫은 주인공 화자에게 전달된다. '어제'도 이미 수차례 반복된 전적 있는 서사 구조를 답습한다. 단, 이곳에서 하루키 소설의 인물들은 독특한 특성을 통해서 스스로를 지나친 보편성으로부터 구원한다. 우선, 간사이 억양을 제것처럼 사용하는 키타루는 '내 차를 운전해'에서 카후쿠가 아내의 불륜 상대의 친구인 척 하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한다. 단순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모방의 과정을 통해서 그는 고의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는 것과 어린 시절의 여자친구인 '에리카'와 섹스를 할 수 없는 것등에서 드러난다. 아마도 화자와 키타루가 친구가 된 것은 '눈 앞에 정답을 두고 멀리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점'이 닮았기 때문이다. 마치 '비틀즈의 어제'처럼 누구나 손쉽게 따라부르는 노래마저 가사를 제멋대로 바꾸는 키타루의 성격에 타니무라는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정답'만을 쫓는 일본 사회에서, 그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눈여겨볼만한 특성임에 틀림없다.





3. 독립적인 장기 An Independent Organ


    '독립적인 장기'는 이 글을 내가 꼭 쓰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작품이다. 언뜻 말도 안되는 조합을 가진 이 단편소설에는 책을 엮은 보이지 않는 실처럼 서로를 연결하는 게 있었고, 독립적인 장기는 그 투명한 실을 나로 하여금 옅게나마 더듬게 만들었다. '독립적인 장기'는 하루키의 여성관/남성관을 가장 확고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것과 다르다. 동시에, 가장 인간 존재의 본연에 드러난 깊이, 에 대한 성찰이 짙은 작품이기도 하다.  


    It feels like somehow our hearts have become intertwined. Like when she feels something, my heart moves in tandem. Like we're two boats tied together with rope. Even if you want to cut the rope, there's no knife sharp enough to do it. 

    마치 그녀와 내 심장이 내적으로 연결된 기분이야. 마치 그녀가 무언가 느낄때, 내 심장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 같아. 우리는 한 밧줄로 이어진 배와도 같아. 네가 그것을 끊어내려고 해도, 단지 그렇게 할 수 있을만큼 날카로운 칼은 존재하지 않아. 


    타인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성공한 피부과 의사로서 인생을 사는 토카이에게 어느 날 이해할 수 없을만큼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온다. 그는, 단순히 사랑에 빠지고 만다. 어떤 종류의 예고도 없이 그는 자신이 영영 경험해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미지의 감각에 스스로를 내맡기게 된다. 최선을 다해서 그는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만 그것은 처음 야구 베이스에 선 투수가 3루까지 내달릴 것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짓이다. 그동안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존재, 아니, 그 어떤 종류의 평가도 할 수 없을만큼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존재에 대한 감각은 '나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 존재'를 만나고 나서야 그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다음 편인 '세헤라자데'에서 볼 수 있듯, 하루키는 인간은 영원히 혼자며, 단순히 희망을 갖고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독립적이고, 내향적이며,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갖고,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만큼 믿음직한' 성품을 지닌 것은 그가 애당초 그런 종류의 인간 외에 이해할 의지가 없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다양한 인간상을 그렸으나, 다양한 화자를 그린 적은 한번도 없다. 영원히 그는 인간 존재의 다양한 군상의 바깥에서 화자를 통해서 그들을 관찰할 뿐이다. 그는 고양이와 같은 태도로 소설을 작성해나간다. 그는 그곳에 있되, '누군가의 친구'로서 더욱 어울리며, 혹은, '누군가의 연인'일 때만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 외의 나머지는 그에게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에 불과하다.


    사랑에 빠진 토카이는 정확히 그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여느 때와 똑같이 '(침착한 태도로 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화자'에게 아우슈비츠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음을 고백한다. 만일 내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면, 그래서 의사의 직함도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나 나만의 취향도 버리게 된다면, 그 때는 무엇이 나에게 남아있을까? 인간 존재의 본연적인 상에 대한 고찰을 그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유대인의 집단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키면서 상상한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가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라졌을때, 나는 무엇이 되는가? 애당초, 나는 무엇이'었'는가? 나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 타인의 존재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그는 비로소 그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었는가?


    결국,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장렬하게 -그러나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버림을 받은 토카이는 시름시름 앓다 소멸의 길에 접어든다. 약 두달 간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사라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끔찍할 만큼 긴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토카이의 죽음을 경험한뒤, 소설의 말미에서 '독립적인 장기'에 대해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모든 여성에겐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독립적인 장기가 있다. 중요한 문제건, 아니건. 그들은 표정이나 말투가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이 하는게 아니라, 바로 그 장기가 독립적으로 행하는 일이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은 '상사병'에 대한 하루키 나름의 철학적인 해체를 뒷받침하는 무언가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대인의 형상은 그가 이해를 돕기 위해 선택한 도구에 불과하다. 정말로, 나의 존재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랑 앞에서 인간은 그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을만큼 깊은 속까지 발가벗겨지고 나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것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진리를 알게 됐을때- 그는 '완성된 존재의 감각'을 덧없이 그리워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곳에는 '정답'이 없다.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것은 갈망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알게된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마도 그러한 자각에서 토카이는 '독립적인 장기'의 존재를 상상한다. 


    토카이는 죽기 전, 잠시 정신이 들었을때, 스쿼시를 치면서 친해진 화자에게 라켓을 선물로 준다. 그러나 그가 준 테니스 라켓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것은, 애당초 그를 위한 게 아니었다. 화자는 손에 익지 않는 것을 사용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채, 달이 존재했을 때부터 이어진 그 끝나지 않는 인류의 질문을 이어간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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