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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Nov 02. 2022

서문

과연 왜 [나]는 이런 것을 겪는가.


아마도 그 물음으로부터 인간은 뭔가를 깨닫기 시작한다. “왜.”


아니, 그것은 내 불행만을 큰 것으로 치부하며 내 자의식을 무의식적으로 비대하게 만들고 그 안에 폐쇄적으로 갇히는 행위가 아니다. [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를 둘러싼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나]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필연적으로 [나]외의 것으로 향한다. 즉, 나에 대한 의문은 남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질만큼 궁금한 것은 늘 [나]로부터 촉발한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편의적인 명칭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왜”를 묻는 순간, 세 가지를 인간은 하게 된다.


1) [나]를 이해하지 못하되, 알기 위해 예술을 한다.

2) [나]를 이해하지 못하되, 믿기 위해 종교를 갖는다.

3) [나]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가 된다.


그렇다면, 나를 믿는다는 행위는 무엇일까?


아마도 나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설명하자면, 내 인생에는 미워해야 마땅한 인간들이 꽤 많은 편이었다. -내 인생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부딪히나, 그 점은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증오하기보단, 일종의 내 존재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을까. 나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증오와 충실한 애정 등 양극단의 감정을 낳은 것일까. 아마도 타자와 부딪히며 자기를 알아가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궁금해했을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왜.


어느 잠들  없는 , 나에 관한 질문은  의식으로 부른  없는 유성처럼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나는 치열한 질문 끝에 어쩔  없이, 그러나 이렇게   알았다는 , 감은 눈의 안쪽에서 우주를 만났다. , 공간을 초월한  만남 이후,  인생은 숱한 싱크로니시티(우연이라 보기 힘든 사건의 겹침 )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에이지 종교를 깊이 수용하게  나의 여정Spiritual Journey 알리고 싶다는 의지에 닿았다. 다만, 나는 우주의 모든 원리가 그러한 것처럼,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적 과정을 통해 이곳에 당도했다. 결코 어쩌다 갑자기 하늘에서 , 하고 깨달음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당신도 똑같은 과정을 통해  글을 읽게 됐을 것이므로.


즉, 이곳에는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순환이 있다. 당신과 내가 그 근거다. 비록 그 내용은 같지 않아도, 그 형태는 정확히 유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통의 형태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제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바로, 뉴에이지 종교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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