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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Nov 03. 2022

들어가기 전

Q&A

과연, 뉴에이지 종교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신을 배신한 사탄이라 부른다. 또는, 함부로 기성 종교를 침범한 자들이라고 무시한다. 그만큼 뉴에이지 종교에 대한 비판은 여러 분야에서 제기됐다. 그러나, 누구도 정확히 우리를 정의한  없다. 만일  정체에 대해 합의가 되지 않았다면, 설령 건설적인 비판일지라도 발전의 밑거름이 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해석한 끝에 나온 분노의 투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양측 모두에게 발전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다는 입장에서 상당히 서글픈 일이다.) 그러므로 글을 시작하기 , 뉴에이져(New-ager, 뉴에이지 종교를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지 오해를 바로 고자 한다.





Q. 뉴에이지 종교는 새로운 종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한 가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뉴에이지 종교는 이곳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던 정신에 불과할 뿐, 한 개의 공고히 서 있는 성전이 아니다.


바로, 무언가 믿고 싶다는 인간의 의지의 발현이다.


현대 사회의 새로운 종교를 만든 이들은 대부분 자기만이 경험한 신에 대해서 논한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어떤 종류의 신성성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존재하는 힘인지 인간의 뇌로 구분하기 매우 어렵다. 그것은 작용하는 허구인가? 그저, 자기실현의 예언에 불과한가? 모든 것은 의식이 만들어낸 가짜인가, 실재하는 우주의 원리인가? 설령 그가 겪은 것이 흔들림 없는 사실일지라도, 누구도 어떤 믿음의 실체와 그 근거를 한 가지의 체계 하에 제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이데아의 비유는 뉴에이져에게 참된 깨달음을 시사한다. 그저 동굴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이것이 사실이다.'라고 믿는 이들로선 빛이 가득한 동굴 밖의 세상이 어떤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실체 [이데아]는 완전히 제3의 눈을 뜨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때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봐야 이해할 수 있단 말일까?


아마도 플라톤처럼 이원론을 믿은 종교라면, 자신들의 독자적인 믿음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다, 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뉴에이져는 획일적인 사고를 신중하게 거부한다. 우리는 개개인의 종교만이 진실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종교를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태도가 뉴에이지 종교에선 중요하다. 왜? 이것은 마치 나에 대한 것을 남이 더 잘 아는 것과 유사하다. 남자를 알고 싶다면, 여자의 관점에서 보라. 백인을 알고 싶다면, 흑인의 관점에서 보라. 언제나 인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봐야 더욱 잘 이해한다. 그러므로, 기존의 서로 간의 벽을 세운 종교의 자의적 판단을 건설적으로 파괴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는데 집중하느라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진리를 경험하고, 그와 같은 영적 여행을 바탕으로 [나]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모든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서 뉴에이져는 자신만의 믿음 체계를 적극적으로 창조해나간다.


뉴에이지 종교의 발생 흐름은 우주와 유사하다. 우주는 수를 셀 수 없는 형태로 갈라지고, 동시에 여러 요소가 진실로서 혼재한다. 지금 이 순간도 그 내부의 일부가 소멸을 할지언정, 끝을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팽창하고 있다. 그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성질을 가졌다. 그 안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 예를 들어, 너무나 명백하게 뉴에이져 특성을 가졌음에도 스스로 그렇게 정체화하지 않는 이도 있는 반면, 기성 종교를 Cherry-picking(한 가지 사상 등의 안 좋은 점은 제외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선택함) 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뉴에이지 종교만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해하는 이도 적지 않다.


Q. 뉴에이지 종교는 기성 종교의 요소들을 문화적 도용한 것은 아닌가?


이것은 종교라는 개념에 대한 일반 대중의 오해로부터 기인한다.


모든 종교는 이전의 다른 종교에서 영향을 받아 태어난다. 그리스의 신들은 이집트의 신들에 영향을 받았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있는 이야기는 구약성서에 나오고, 무함마드를 따르는 자는 예수를 믿는 자들과 같은 신을 믿으며, 불교와 힌두교는 완전히 독립적인 체계로 보기 어렵다. 즉, 어떤 한 종교가 탄생했을 땐, 어떤 문화권의 집단에 당대에 가장 와닿는 것을 선택한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에 속해서 사는 인간의 특성상 각 지역에 국한하는 성격을 가졌다. 예를 들어, 고대 바빌로니아인은 점성학을 발전시켰고, 이집트에는 제사장이 있었을 것이며, 전통적으로 남미 문화권에선 shaman이 각 지역에서 재배하는 약물로 음료를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즉, 원래 종교는 문화의 한 종류로서, 어느 한 집단의 정신을 구원하는 동시에 그 공동체 의식을 공고하게 굳히는 역할을 해왔다.


뉴에이지 종교가 각 종교에서 원하는 것만 취사선택한다고 비판하는 이들은 종교의 성격 중 후자에 집중한 결과다. 물론, 최대한 다양한 종교에서 요소를 선택하여 하나의 믿음으로 집대성한다는 점에서 뉴에이지 종교는 ‘cherry-picking’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특정한 종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카르마 karma(업보)의 개념을 우주와 연결 지어 제시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신곡을 듣고, 불교나 힌두교 등 전생을 상정하는 종교인은 Cultural Appropriation문화 도용이라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Dolores Cannon 등의 최면술사부터 Brian Weiss 같은 정신과 의사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회는 끊임없이 전생에 대한 영적 탐험을 시도했다. 유럽의 마녀들은 어떤가? 샤먼들은? 대부분 민속신앙은 조상 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즉, 어느 한 문화권에서 자신만의 것이라고 상정했던 것들은 그 벽을 조심스레 걷어내면, 다른 지역과 시기에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비록 한 가지 믿음체계로 정의할 수 없을지언정, 뉴에이지 종교는 바로 그 역사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어떻게 21세기에 이처럼 빠르게 기성 종교에 대한 재고가 이뤄졌을까?


언젠가 상업의 발달로 천년의 중세가 막을 내리고 상업 계층이 주도하는 르네상스가 발생한 것처럼, 스마트폰은 기존의 소수가 갖고 있던 미디어 권력이 그것을 갖지 못한 대중에게 분산시키며 제2의 르네상스를 촉발시켰다. 한편, 코로나는 그 흐름을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더 이상 지역의 교회나 모스크를 찾아가는 것보다, 아이폰으로 기존의 방식대로라면 얻을 수 없던 정보에 어느 때보다 인류는 빠르게 접촉하게 됐다. 이제, 기존의 지역색이 두드러진 종교적 한계를 벗어나, 스마트폰 등 기술의 발달로 보다 빠르게 한 사람의 삶에서 교차하는 수백 가지 믿음의 갈래 속에서 자기만의 통합적 사상을 정당하게 발전시킬 근거를 얻었다. 그러므로, 점점 더 문화권을 넘어서 통합적으로 종교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이 설명도 당신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盲人摸象(맹인모상)의 중국 설화를 소개한다. 한번,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져보아라. 그것은 무슨 모양인가? 서로 다른 분위를 만지는 이들은 저마다의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모두 코끼리다. 하지만, 과연, 코끼리를 제대로 만졌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서 "정말로 그런 자"가 있을까? 그처럼, 한 문화권에 국한된 환경을 가진 이가 자기만이 신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그 어느 때보다 참혹한 분열의 시대,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만지는 코끼리의 부위가 전부는 아닐 수도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지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른 위치에 서 있음'을 아는 이를 비난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위치에 서 있던 자를 틀렸다고 비난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다. 그 어느 종교보다, 뉴에이져는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한다.


Q. 뉴에이지 종교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대로, 뉴에이지 종교는 ‘한 가지의 일관적인 믿음 체계로 정의하거나, 동일한 신을 믿는 곳’이 아니다. 단, 이 책은 뉴에이지 종교를 크게 4갈래로 분류했다. [초현상계, 명상계, 주술계, 그리고 천체계]다. 각 분야는 반드시 뉴에이지 종교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자기만의 독특한 믿음체계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완전히 타 갈래와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서로 어떤 믿음을 서로 공유하는지, 어떻게 한 가지 집단에 속한 이들도 다른 집단과 서로 필수 불가결한 관계를 믿고 있는지 논의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단 하나, 매니 페스 테이션(manifestation)을 어떻게 다루는지, 분석하기 위함이다.


거의 유일하게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부정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영혼"이다. 심지어 가장 과학적 접근을 선호하는 초현상계도 이원론을 믿는다. (최소한,  존재에 대해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디에서,  있는 것일까. 뉴에이지 종교는  모호한 질문에 걸맞을만큼 광활한 대답을 내놓는다. 바로, 우주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는 무엇인가. 우주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역시 우주의 일부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나"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지만, 그동안 "나"의 존재를 밝힌 종교도, 명확히 분석한 철학자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지는 '나'가 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까? 예를 들어, 나는 OO다, 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나는 부자다, 나는 즐겁다, 나는 예쁘다, 등 다양한 수식어를 이 안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명제를 의식한 순간, 우주에 이것은 새겨지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내 인생을 실천적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면?


모든 종교가 인간의 위치를 초월하여 소원을 이뤄주는 존재를 상정한다. 인간의 삶을 실천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힘, 이 바로 종교다. 매니페스테이션은 그 방법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이다.뉴에이지 종교는 우주라는 광활한 존재의 역할을 신봉한다. 우주는 인과관계 그 자체이자, 인과관계를 담는 터다. 마치, 모든 시, 공간 그 자체이자, 시, 공간을 담는 터인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 지는, "나"에게 달렸다. 왜?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나 역시 우주의 일부다. 한편, '나'가 존재하지 않고선 어떤 우주도 의미없다. 우주는 내 의식 위에 펼쳐질 때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가장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의식한 우주다. 즉, 차후에 살펴보겠지만, 매니페스테이션을 이루는 열쇠는 '내가 우주를 의식하는 상태'에 있다. 우주는 그것을 의식하는 이의 내면에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나는 OO하다, 라는 명제를 인식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그 순간, 이미 그것은 마치 우주의 객관적 정보처럼 사실로서 인정을 받은 셈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인지하는 태도를 조정할 수 있다면, 내 우주에 어떤 것이 발생할 지도 내가 통제할 수 있다, 는 말이 아닌가? 예를 들어, 나는 성공한 사업가다, 라는 명제를 인식했다고 해보자. 당신은 방금 전 '나'가 의식한 우주에 '나'가 원하는 것을 새겨넣은 동시에, 그것을 사실로서 발견한 셈이 된다. 왜 그것이 사실로서 이뤄지지 않겠는가.


즉, 모든 사고의 권력을 '나'에게 돌려주고, '나'를 우주와 동일시(align)하는 것. 단순히 물리적 환경에 갇힌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참된 의미를 알고 내 인생을 적극적으로 바꿔나갈 근본적 힘을 깨닫길 희망하는 것. 바로 그것이 뉴에이지 종교 안의 숱한 갈래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한 가지 더,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 당부해야 할 것 같다.


먼저, 뉴에이지 종교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뉴에이지 종교에 대한 기성 종교의 문화적 도용은 그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특히 더 사이비 종교 행위에 사용될 우려가 있다. 명백히 우리 종교 안에 있는 믿음 체계도, 뉴에이지 종교 특성상 그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약점으로 삼아, 타 종교가 자기의 것인양 슬그머니 포섭하여 자기 것인양 판매하거나, 심리학의 일환인양 중요한 문맥은 작가가 이해하지 못했으니 빼버리고, 그럴 듯한 요점만 남겨 실제적으로 이루는 것은 없고, 속담같은 말이나 유행하는 원칙만 책에 남긴 것은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다.


둘째, 모든 종교는 문화적 상황 등 고유의 시대상에 영향을 받는다.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시대, 현대인을 위한 종교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과학,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받은 뉴에이지 종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학문으로서 '나'를 알아갈 계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것은 에너지, 싱크로니시티, 앤젤넘버 등 뉴에이지 종교가 아님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하는 이들에게 효율적으로 신성성을 이해하게 돕는다. 또한, 기존에 존재했던 Pegan 문화 등을 포섭하여 하나의 갈래로 집대성하는 것은, 이미 학문이 된 타 종교에 저항할 힘을 제공하기에 의미있다. 예를 들어, 퀴어 등을 탄압하는 기성 종교와 달리, 그리스의 신들은 남성 동성애자에 대해 이렇다할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인본주의를 근거로 임신주절을 미덕으로 여기던 때였다. 그러므로, 포용의 정신으로, 뉴에이지 종교는 '뉴에이져'라는 단어로서, 모두 종교의 힘을 경험할 수 있게 돕는다.


단,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뉴에이지 종교의 장점은 단점도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뉴에이지 종교는 기성 종교처럼 하나의 집단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그 어느 종교보다 뉴에이져의 믿음의 결과는 개인에게 책임이 가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개인의 경험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인정하는 뉴에이지 종교 내의 분위기를 핑계로, 어떤 종류의 신비로운 힘도 없음에도 스스로 영매라고 주장하거나, 타인의 삶을 이용하기 위해서 우리 종교의 요소를 악용하는 이도 있음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또한, 뉴에이지 종교의 특성상, 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믿음의 수는 거의 우주가 포섭할 수 있는 별의 수만큼 허용된다. 그러므로 어떤 점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듯 믿음의 지도를 만들지는 오로지 당신에게 달렸다. "당신에게 가장 와닿는대로 믿으라. 당신의 경험이, 우주가 당신에게 전해주는 메세지다. 그것은 그 누구도 간섭해선 안되고, 당신의 경험 그 자체다."는 모든 뉴에이지 종교인의 입버릇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종류의 교단을 설정한 이상, 그것은 뉴에이지 종교의 특성에서 벗어난다. 그저, "그" 종교가 될 뿐이다. 우리는 개인의 영적 여행에 집중한다. 특정한 교단 및 교리, 교주가 없으므로 전도를 강요할 수 없는 구조를 가졌다. 그저, 영적 지도자를 존중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만나야 한다면 만나도록 우주는 이미 그렇게 정해놨을 것이다.


더 이상 우주에 대해 깊은 말을 하기 전에, 정말로 글을 시작해보자. 뉴에이지 종교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나는 안내자를 자처한다. 이제 뉴에이지 종교에 어떤 갈래가 있고, 어떤 것을 이 종교의 특성으로 볼 수 있으며, 어떤 것을 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나머지는 이 글이 안내하는대로 걷다, 어떤 부분이 가장 와닿는지 당신이 결정할 일이다. 과연 <우주>는 어떻게 내 소원을 들어줄까? 아니, 그 전에 <우주>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정말로, “나를 위한 우주”는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내 삶에 작용하고 있을까?


모든 곳에 진리가 있다. 어떤 것을 알게 될지는, 우주를 부유하는 영혼의 여행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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