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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Mar 11. 2020

대화능력은 타고나는 것일까?

대화의 원리. 6화

대화는 '말하기'와 '듣기'로 구성된다. 얼핏 보면 '듣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말하기' 능력은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한 내 생각과 대화를 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훈련방법을 정리해보려 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말하기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따져봐야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쉴 새 없이 말을 할 줄 아는 능력? 재치 있는 말을 하는 능력?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 우리는 항상 추상적으로 '말하는 능력'을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예능인들은 재치 있고 말하고 웃음을 끌어내는 말하기는 잘하지만 논리적인 말하기는 약한 경우가 많다. 사기꾼들은 과장해서 사람을 정신없게 만드는 말하기는 잘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그 말이 그렇게 논리적이지는 않다. 인간의 욕구를 건드려서 귀를 멀게 할 뿐. 그리고 '알쓸신잡'에 나오는 박사들은 말을 논리적이고 유려하게 하지만 그들이 예능인들 같은 말하기를 잘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말하기 능력' 자체가 뛰어난 사람은 없다. '특정한 형태의 말하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을 뿐ㅏ. 그런데 그러한 '특정한 말하기'는 그 사람의 사고체계가 표현되는 방식이다. 특정한 말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그런 방향으로의 능력이 탁월한 것이지 말하기 능력 자체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말하기 중에 예능인들에게 필요한 감각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 맞는 듯하다. 상대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상대를 웃기는 말을 하는 건 엄청난 훈련을 한다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감각이 필요한 영역의 말하기 이외의 영역에서의 말하기는 충분한 훈련을 통해 더 잘하게 될 수 있다. 이는 사실 '말하기'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사고체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그 사람들은 보통 본인이 관심이 있고 오래 고민했거나 공부한 영역에 대해서만 말을 잘한다. 그들이 모든 상황에서 언제든지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말하기 위한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재료를 온전히 소화해내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영역의 내용이 그 자리에서 말로 표현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의 대화를 잘 들어보면 한 대화를 함에 있어서도 그들이 자신의 전공영역에서 그걸 바라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 한 번 생각해보자. 본인이 말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본인이 가장 말을 많이, 편하게 했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 자리에서도 본인이 말을 잘 못했나? 아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말을 잘하는 영역이 일정 부분 있다. 그리고 그건 본인이 가장 많이 고민했거나 접했던 영역일 것이다. 그 영역이 많거나 넓은 사람이 있고 굉장히 좁고 적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본인이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본인이 충분히 자신의 생각이나 시선을 다듬을 정도로 생각해보거나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식이 많으면 말을 잘한다'라고 생각해서 책을 많이 읽지만 사실 책을 읽는 것 그 자체는 그 사람에게 지식을 더해주지 않는다. 책을 읽고, 그 책의 내용에 나와 있는 내용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에 대한 본인의 입장은 어떠한지, 왜 그런지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고 그 경험이 지속적으로 쌓여야 비로소 독서는 본인에게 의미가 있고 그 주제에 대한 말을 잘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그냥 말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은 보통 생각이 많고 다양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사실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은 그 영역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말을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순발력이 필요한 면접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라고 물을지 모른다. 그런데 특정 영역에 대한 말하기의 순발력은 그 사람이 그 영역에 대한 경험과 고민이 많을수록 발달된다. 이는 특정 영역에 대한 경험과 고민이 많을수록 그와 관련된 팩트를 더 많이, 깊게 알고 있고 그 영역에서 뇌가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정보처리가 빨리 되어서 그 영역 관련 면접 질문이 나오면 순발력 있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영역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깊이 있는 경험과 지식을 갖춘 사람들은 뇌를 그런 방향으로 훈련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지식과 경험을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빠르게 습득한다. 이는 세상이 엄청나게 복잡해 보이지만 엄청나게 전문적인 영역이 아닌 이상 세상이 돌아가는 기본적인 원리는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선순환 고리가 생기다 보면 그 사람은 박학다식해지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 


결국 누군가가 말을 잘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평상시에 충분한 생각과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양한 경험'은 꼭 돈을 들여서 해야 하는 경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낯선 환경과 상황에 많이 직면하면 우리는 누구나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그 과정이 엄청 귀찮고 고통스럽다는 데 있다. 이는 운동과 비슷한데, 운동을 안 해서 근육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낯선 운동을 해서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사용하게 되면 그 근육이 아프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단련될 때까지 운동을 하는 사람은 그 운동에 익숙해지고 몸이 좋아질 것이고, 그냥 포기하는 사람들은 신체에 노화가 찾아올수록 몸이 안 좋아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공부하고 낯선 곳에 가고 새로운 경험하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다고 놔버리면 그 사람의 뇌는 훈련이 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말을 잘하게 될 수 없다. 


사실 그러한 훈련은 학교에서 교육과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 학생들이 우리나라나 다른 아시아 학생들보다 말을 잘하는 것은 그들은 교육과정에서 그렇게 사고하고 고민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학생들은 사고하고 고민하지 말고 그냥 답을 외우도록 강요받는다. 심지어 다양성을 존중하기보다 획일성과 통일성을 강요받는다. 그렇다 보니 지식의 양은 늘어나지만 그걸 소화한 사람들은 많지 않게 될뿐 아니라 모두가 같은 교실 안에서 같은 내용을 접하니 다양한 경험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마치 음식을 위에 쑤셔넣긴 했는데 위가 소화는 하지 못하는 상태와 비슷하다. 이와 달리 유럽이나 미국 학생들은 음식을 많이 넣지 않아도 계속 소화하는 훈련을 해서 나중에는 더 많은 음식을 소화할 수 있게 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말을 우리나라 사람보다 잘하는 것은 그 영향이다. 


여기에 한 가지만 보태자면 사실 '학원'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는 건 '다양한 경험'을 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이는 학원에서는 특정한 것을 하는 요령, 방법과 기술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학원은 '결과'를 쉽게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그걸 다른 사람이 리딩해주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하는 근육이 생기더라도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트레이닝에는 '과정'이 핵심인데 학원은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학원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학원들이 그런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다양한 학원에 다니면 다양한 경험은 하게 되지만 새로운 것을 '스스로' 핵결하는 능력이 길러지지는 않는다.


여기까지 '말하기'에 대해서만 설명한 것은 '듣기'의 원리도 '말하기'와 기본적인 원리가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듣고 있기 위해서는 그 말의 내용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말하는 능력이 있단 것은 본인의 생각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단 것이고,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낼 생각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소화하는 능력이 있고 그 소화하는 능력은 결국 듣는 능력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그 시작점은 본인이 작고 익숙한 주제에 대해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을 앞에 놓고, 한 가지 입장을 취하면서 (1) 왜 본인 입장이 맞는지와 (2) 왜 상대 입장이 틀린지에 대해 글로 정리해 보는 게 될 것이다. 이는 사람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생각이 정리가 되어야 하고, 생각이 정리되어야 그걸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경우 그 주제에 대한 제삼자의 입장을 본인의 입장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말을 잘한다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교육과정에서 암기하도록 훈련만 받았다 보니 암기한 내용이 본인의 생각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위에 집어넣었던 음식을 다시 끄집어내서 보여주는 것이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본인의 입장이 누군가와 같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사람의 입장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집어서 그게 왜 맞는지와 어떤 맥락에서 맞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말 잘하기나 대화하는 법에 대한 책을 읽는다고, 그 안에 나온 기술을 연습한다고 해서 말을, 대화를 잘하게 되진 않는다. 말하기를 배운다면, 그건 이런 과정을 본인이 하고 본인이 쓴 글이나 생각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과정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그런 작업을 해주는 사람은 '대화하는 법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라기보단 '코치'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일정기간 이상 동안의 지속적인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습관이 들고 고민해보는 영역이 확장되면 각 영역끼리 시너지를 내면서 그 사람이 말을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그게 하루아침에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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