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 ‘우리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정해진 시간 안에 정답을 고르는 능력을 측정합니다. 이 능력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죠.
- 권정민, <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 중 발췌
자기소개는 나를 소개하는 작업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일이죠. 자, 그렇다면 나를 소개할 때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이름이 있겠죠. 그런 다음에는? 직업이나 사는 지역을 간단히 말할 수 있겠고, 가족이 있다면 몇남 몇녀인지를 소개할 수도 있겠죠. 배우자가 있다면 배우자 이름을, 아이들이 있다면 아이들을 떠올리는 분도 있을 테고요. 그다음에는요?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좋아하는 색깔이나 계절, 시간, 날씨, 음식, 가끔 곁들여 마시는 술이나 유독 강한 주종에 대해 자랑할 수도 있고요. 취미를 말할 수도 있을 거예요. 만약 캠핑이나 낚시를 좋아한다면 여태껏 수집한 장비에 대해 설명하거나 희귀한 명소를 알려줄 수도 있고, 운 좋게 잡은 특별한 어종에 대해 으쓱거릴 수도 있겠죠.
책이나 영화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책, 영화, 드라마, 혹은 노래나 가수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것 혹은 그들이 왜 좋은지, 특별히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아니면 갑자기,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게 되었는지 등을 대략적으로만 설명해도 몇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겠군요. 그다음에는 또 뭐가 있을까요. 그래요. 잊혀지지 않는 순간. 소중한 사람과 나누었던 말들과 눈짓, 시간에 아로새겨진 찬란한 기억. 그리고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미세한 자극들. 바람결에 따라 흘러오는 겨울 냄새와 문득 떠오르는 찰나의 과거. 그런 것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아마 목록은 끝없이 이어질 겁니다. 한 사람을 소개하는 방법이 어디 하나뿐이겠습니까.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인데요.
이처럼 자기소개는 스스로에 대해 여과 없이 소개하는 일... 뭐라고요? 네? 이게 정말 올바른 자기소개가 맞느냐고요? 무언가 뭉텅이로 생략된 거 같다고요? 음, 그렇다면 <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 그림책을 한번 확인해 봅시다. <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고양이를 측정해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기준들을 알려주니까요! (왜 사람이 아니고 고양이냐고요? 고양이가 사람보다 귀엽잖아요. 털 부숭부숭한 인간보다야 털이 보슬보슬한 고양이가 무더기로 나오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이 책을 보면 아마 앞서 소개한 목록에서 무엇이 빠졌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틀림없이요. 어디 보자. 오. 그렇군요. 음. 심각하게 많은 것들이 빠졌었네요! 자 그럼, 추가할 내용들을 적어 봅시다.
키, 몸무게, 털(혹은 피부) 색깔, 체력, 반사 신경, 회복탄성력, 멍멍어(혹은 외국어) 능력, 학벌, 연봉
와. 앞선 목록과 단 한 개도 겹치는 게 없군요! 어쩜 이렇게 하나도 겹치는 게 없는지! 뭐라고요? 소득 수준과 소비 수준, 사회적 위치와 인맥도 없다고요? 명품 쇼핑과 고급 레스토랑 방문 인증샷?! 이런 게 대체 왜 필요하죠? 어쨌든. 이런 것도 있어야 하는군요. 음, 이토록 측정할 수 있는 것들이 중요하다니. 우리를 소개하는 데 이토록 ‘측정’이 중요했다니. 어쩌면 오늘부로 이 ‘자기소개 강의’를 폐쇄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뭐, 오늘 시작한 거니 큰 미련은 없지만, 그새 이렇게나 자기소개하는 방법이 달라졌다니. 충격이군요.
분명 언젠가 한 때는 자기소개를 다르게 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이름 뒤에 나오는 설명이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 수준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나를 만들어온 것들, 내가 앞으로 사랑할 것들로 채워졌던 적이 있지 않았나요? 아닌가요? 제 기억이 잘못된 거라고요? 우리는 한 번도 그런 것들로 자기소개를 한 적이 없다고요? 자기소개는 신속하게 서로를 파악하고, 짧은 시간 안에 나의 위치를 판별하는 장치라고요? 대체 언제부터요? 언제부터 자기소개가 내가 얼마나 쓸모있는 사람인지를 부각하고, 남보다 얼마나 우월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절차였죠?
<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의 후반부에도 나오잖아요. 여기 보세요. 결국 고양이들도 측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시름하지 않습니까. ‘품위 유지비, 타인의 관심,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 잠 못 드는 시간, 외로움, 고독’! 봐요. 결국 이런 것들까지 측정하면서 괴로워하잖아요. 측정할 수 있는 것이 기준이 되어 버리면 결국 이 고양이들처럼 고통스러워진다고요! 그러니까 우리도 이 고양이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 왜 다들 그런 얼굴로 저를 보세요? 왜 그러시는 거죠? 어? 다들.. 다들 어디 가... 어디 가세요!
음... 아무래도 오늘 강의는 여기서 이만 마쳐야겠군요. 물론, 객석에는 아무도 없으니 그냥 가 버려도 그만이겠지만, 언제나 매듭짓는 게 버릇이 되어서요. 시간을 내어 와 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언가를 알아가셨기를 바랍니다. 물론, 아마도, 오늘 강의에서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은, 강의를 주최한 저일 테지만 말이죠. 그럼, 모두들 안녕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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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언제부터 천지개벽하듯 바뀌어 버린 건지, 원. 자기소개하는 방법이 이렇게 수치와 측정으로 얼룩져 버리다니. 강의 노트를 이참에 싹 바꿔 버리든지 해 버려야겠어. 대체 왜 이렇게 모든 게 다 확확 바뀌는 거야? 이제는 따라가기조차 버겁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