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책방공책’에서 우연히 만난
결국은 우리한테 남는 건 그것뿐이야. 타인과의 연결 말이야. (p.300)
우리는 그녀에게 늪지 쓰레기라는 딱지를 붙이고 거부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캐서린 클라크를 소외시켰던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소외시켰기 때문에 그녀가 우리와 달라진 건가요? (p.421)
-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중 발췌
외로움은 치명적인 관성입니다. 발바닥에 붙은 끈끈이 같아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본능처럼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가게 되죠. 외로움이 남긴 상처가 무서운 이유는 회귀가 지독할 정도로 빨라서입니다. 회복하자마자 재발하는 암세포처럼 아주 작은 계기로도 금세 자라나 버려서, 평생을 다해 공을 들여도 잘 치유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랑과 믿음, 애정을 쏟아부어도 금방 덧나 버리기 십상이죠. 요새는 약간 사그라들긴 했지만, 한동안 ‘영유아기 애착 형성’이 부모들 사이에서 급부상했던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외로움을 학습한 아이는 평생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며 살아야 하고, 그건 생각보다 많은 문제의 불씨가 되니까요.
※ 이번 서평에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 내용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스포에 노출되고 싶지 않다면 여기까지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 카야는 그런 외로움에 오랜 기간 노출된 인물입니다. 카야의 외로움은 페이지마다 다른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어릴 때는 가족에게 버려진 습지 소녀의 모습으로, 청소년 이후에는 테이트가 이질감을 느껴 도망쳤던 야생 인간의 모습으로, 성인이 된 이후에는 성폭력 피해자이자 살인 누명을 쓴 여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죠. 하지만 카야의 외로움이 가장 극대화된 대목은 아무래도 소설의 결말이 아닐까 합니다. 평생을 다해 카야를 사랑했던 테이트마저 알지 못했던 진짜 카야의 모습이 밝혀지는 대목. 실은 그녀가 체이스를 살인했으며, 그럼에도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아갔음을 깨닫는 순간. 아름다운 시로 살인을 승화하고서 승자의 미소로 생을 이어갔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 말이죠.
혹자는 이 장면을 다분히 ‘카야답다’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녀는 시련을 극복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린 나이에 습지에 홀로 버려졌지만, 홍합을 캐는 등의 방법을 터득해 살아남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평생 관찰해 온 자연의 모습을 책으로 엮어 자신을 업신여긴 마을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널리 이름을 알린 작가가 되었죠. 삶의 매 순간 장애물이 등장해 그녀를 꺾으려 했지만, 그녀는 휘어졌을 뿐, 단 한 번도 부러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늘 생존하는 사람이었고, 이번에도 생존하기 위해 최선의 방편을 찾았을 뿐입니다. 때로는 인내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철저히 ‘야생’의 관점입니다. 만약 카야가 습지에 서식하는 비버나 순록이었다면, 그녀의 인생은 한 편의 훌륭한 생존의 기록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카야는 애석하게도(?) 사람이었고, 인간 사회에서 도태되었다고는 하나, 그리 멀리 떨어져 살아간 인물은 아닙니다. 습지에서 혼자 살았을 뿐이지, 늑대 인간처럼 동물의 손에서 길러진 완전한 대자연의 아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선택과 태도를 인간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나 법정에서 보였던 일관되게 무관심했던 태도, 어떤 회유에도 무죄를 주장하던 강경한 모습, 무죄 선고 이후 일상으로 되돌아가 전과 같이, 혹은 전보다 더 행복한 나날을 살았던 시간들까지.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선택에 고통받거나 후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적어도 겉보기에 그녀는 후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못했죠. 심지어 평생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던 테이트조차도, 그녀가 살인의 당사자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카야가 자신의 본심을 철저하게 감추었거나, 혹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기 때문이겠죠.
이쯤 되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폭행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한 건 정당방위의 한 방법이라고요. 카야는 체이스에게서 벗어나 더 행복한 삶을 살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성폭행 가해자는 어떤 변명으로도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살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내 손으로 죽이는 행위는,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하다못해 내가 뿌린 에프킬라에 작은 벌레가 꿈틀거리다가 숨을 거두어도 기분이 묘해지는데, 사람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했다면 어떤 방면으로라도 트라우마가 남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카야의 법정 싸움과 그 이후의 나날들을 묘사한 어떤 문장에서도 번뇌는 보이지 않습니다. 해방감과 행복감, 평안함과 안온함.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카야는 냉혈한이었던 걸까요. 자신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서운 인간이었던 걸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단지 외로운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지독하고도 처절한 외로움과 만성적인 고독이 빚어낸, 서글프게 변형된 인간이었을 뿐이죠.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작가 인터뷰에서 소설의 주제를 ‘외로움’이라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주제 의식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카야는 세상 사람들에게 거듭 버려지고, 내쳐지고, 할퀴어졌지만, 마지막까지 그녀 곁에 머문 건 결국 사랑이었습니다. 테이트는 잠시 그녀를 버리고 도망치긴 했지만, 되돌아온 후에는 평생을 그녀와 지냈고, 오빠인 조디도 어린 시절 집을 버리고 떠났지만, 성인이 된 후에 다시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업신여겼지만, 그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마지막에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판사와 변호사는 오히려 카야의 편에서 그녀를 옹호해 주었죠. 카야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그녀를 악하게 보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다수에게 무시 받긴 했지만,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한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네 삶이 대체로 그러한 것처럼요.
그럼에도 작가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제 의식이 외로움이라 말합니다. 외로움으로 변화하게 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많은 이들이 이 대목을 ‘외로움을 극복해낸 카야’ 정도로 해석해서 외로움을 카야가 극복한 장애물 정도로 이해하지만, 개인적으로 소설의 주제가 외로움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카야가 평생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두 번째 읽을 때쯤 알겠더라고요. 카야가 눈 감는 순간까지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갇혀 있었음을.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마지막 반전, 즉, 살인을 모두에게 끝끝내 감춘 카야의 태도이고, 둘째는 카야의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문장들 때문입니다.
마지막 반전부터 살펴보면, 앞서 언급했듯, 카야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테이트에게마저 살인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살인의 진실을 말하지 못한 것뿐이지만, 사실 살인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살인하는 찰나에 느꼈을 막대한 두려움, 생명의 신호가 사라진 체이스의 눈을 보며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었을 극심한 공포, 자신의 범죄 증거들을 지우면서 마주했을 모멸감과 좌절감. 살인의 과정에서 온몸을 훑고 지나갔을 인간 이하로 전락하는 것 같은 감정들은, 카야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했을 도덕적으로, 감정적으로 가장 취약해진 순간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나의 진짜 민낯을 보게 된 순간이었을지도 모르죠. 카야가 테이트에게 살인 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건, 이 모든 감정들을 단 한 번도 테이트와 공유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눈 감는 순간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을요. 살인에 관련한 어떠한 악몽을 꾸든, 혼란을 겪든, 카야는 모든 고통을 테이트에게 철저히 감춘 채, 온전히 홀로 감내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카야는 자신이 눈 감는 순간을 테이트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카야는 여느 날처럼 채집 여행을 나섰고, 테이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배낭을 베고서 자는 듯이 죽어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작가가 ‘외로움’을 야생과 정말 잘 접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야생성이 남아 있는 동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바로 ‘죽는 순간을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강아지는 같이 사는 사람 곁에 와서 숨을 거두지만, 고양이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을 거둔다고요. 카야는 후자였던 것입니다. 테이트를 깊이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지만, 그녀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그녀만의 공고한 영역이 있었고, 결국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지요.
카야는 평생 외로웠을 겁니다. 외로움은 늪지와 같아서 한 번 생겨나면 쉽게 사라지지 않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게 되니까요. 어쩌면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티 한 번 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외로움에 깊이 침잠해 있어서일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말처럼 외로움은 한 인간을 전과 다른 무언가로 바꾸어 놓아서, 타인과 나를 분리시켜 버리니까요. 최근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묻지 마 살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남들과 내가 완전한 타인이라고 여겨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상대의 안위나 감정을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화가 나면 마구 찌르며 분풀이해도 괜찮은, 도구적이고 사물적인 관점으로 타인을 관망하게 되는 것이죠. 만약 살인에 ‘정당 방어’나 ‘정의 실현’ 같은 구실이라도 덧붙게 되면, 옅게 남은 도덕적인 가책마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고요. (물론, 묻지 마 살인을 한 범죄자들과 카야를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카야에게 상당히 실례되는 일이지만, 맥락상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야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는, 그녀의 살인을 알면서도 묵과하게 되는 이유는, 오히려 체이스가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힐 수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녀를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가 얼마나 세상과 연결되고 싶어 했고, 소통하고 싶어 했고,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어 했는지를. 그 과정을 통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고, 외면받고 멸시당했으며,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짓밟혔는지를, 기나긴 이야기를 통해 진심으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카야의 말처럼 그녀는 한 번도 마을 사람들을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미워한 건 그들이었습니다. 그녀를 놀려댔고, 괴롭히고, 습격하고, 떠나버린 건 그들이었죠.(p.434) 그런 카야의 인생을 아는 이상, 우리들은 카야의 살인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살인을 평생 함구했다는 사실 앞에서도 되려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하게 되죠. 테이트는 이미 한 번 카야를 배신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런 카야의 과거를 알기 때문에, 그때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녀에게는 최선이었다고 납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카야의 변호사 톰은 법정에 앉아있는 걸 힘들어하는 카야를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배심원들은 부재한 피고인에게 선고 내리는 걸 더 쉽게 생각하거든요’ (p.413) 최고형인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심원에게 얼굴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걸 설명하는 대목이지만, 이 문장에는 사실 그보다 더 많은 함의가 담겨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재한 피고인, 얼굴조차 모르는 피고인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죠. 즉, 잘 모르는 타인을 대할 때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외로움에 잠식된 사람이 나 아닌 모두를 타인으로 생각할 때의 태도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외로움에 잠식된 사람이 나와 남을 완전히 분리된 집단으로 인식할 때 더 공격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타인들로 이루어진 집단 또한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를 대할 때 더 무책임하게 변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해결책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무관심에서 촉발된 오해와 불상사, 불필요한 감정 소모와 분쟁, 그리고 아까운 생명의 소멸. 서글픈 외로움의 파생물들을 상쇄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지 ‘아는 것’뿐이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서로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카야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몹쓸 일이 터지자마자 보안관을 찾아가거나 주변인들에게 보호를 먼저 요청하지 않았을까요? 체이스는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을 테고 말입니다.
고독함. 고립감. 세상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라는 그릇된 믿음. 아무도 나를 돕지 않을 것이라는 서러운 확신. 외로움에서 비롯된 여러 감정들은 생각보다 큰 폭으로 사회를 좀먹습니다. 비단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카야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습지에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카야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도심에도, 골목에도, 어쩌면 당신의 옆집이나 윗층이나 아래층에도.
그들에게 당신은 체이스인가요, 테이트인가요, 마을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톰이나 조디나 점핑인가요? 무수한 카야들이 양산되는 현재, 우리가 진정으로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앉아서 고민해 봐야 할 때입니다.
책방공책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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