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디의 시작
2018년 5월,
드디어 워킹비자를 받아 프랑크푸르트(프푸)에 입성했다. 두둥!
2017년 3월 부터 살던 아헨은 인구 약 24만명의 작은 도시였는데, 80만명의 프푸는 트램과 U반까지 있어 마치 또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했다. 가는 곳마다 볼거리가 넘쳐났고, 거리마다 활기찬 리듬이 있었다. 무엇보다, 구글맵에 ‘한국식당’을 검색하면 셀 수 없이 많은 식당들이 반짝였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근처 높은 빌딩에는 아시아나 항공 로고까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낯선 도시 속에서도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마치 ‘잘 왔어’ 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나의 새 보금자리는 프푸 서쪽의 ’획스트(Höchst)’라는 동네였다. 오래된 건물과 강가의 풍경이 어우러진, 좀 시끄럽지만, 다정한 동네였다. 나는 그곳에서 WG(공동주거) 형태로 살게 되었다. 프푸 공항에서 일하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나탈리, 그리고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스페인 출신 안나와 함께였다. 서로 국적도 다르고 일상도 달랐지만, 우리는 곧 자연스럽게 룸메이트가 되었다. 내 방은 27제곱미터. 꽤 넓은 공간이었지만, 막 이사 온 터라 가구 하나 없이 휑했다. 옷가지며 서류들은 박스에 그대로 담겨 있었고, 첫날 밤은 요가 매트를 깔고 잠들었다. 낯선 방, 낯선 도시, 하지만 어딘가 새로 시작된다는 생각에 설렜다.
드디어 첫 출근날!
긴장된 마음으로 광역전철인 S-Bahn(Schnellbahn / Stadtschnellbahn)을 타고 슈발바흐(Schwalbach)역에 내렸다. 역을 나서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온 건물, 그곳이 내가 일하게 될 회사가 있는 곳이었다. 중화루라는 한식당 바로 옆 건물엔 다양한 한국 기업들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내가 지원한 회사는 한국의 대기업 계열사였지만, 그 안에서도 여러 부서가 나뉘어 있었다. BIO 부서는 이미 유럽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듯, 체계적이고 정돈된 분위기를 풍겼다. 반면, 내가 속하게 된 식품 부서는 이제 막 유럽 진출을 시작한, 스타트업 같은 팀이었다. 식품 부서 사무실은 내 침실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아담한 공간이었고,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함께 일하는 아기자기한 팀이었다.
주력 제품은 만두였다.
한국에서는 흔하고 친근한 음식이지만, 유럽 시장에서는 아직 낯설고 새로운 제품이었다. 나는 신제품 출시 전략, 시장 조사, 포장재 디자인, 행사 디자인 등 마케팅과 디자인에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야 했다. 당시엔 프푸 근교의 독일 현지 공장에서 만두를 위탁 생산하고 있었고, 제품 라인업은 고작 일곱 가지뿐이었다. 매출이 턱없이 적었기에, 신제품 개발이 시급했다. 현지 마트와 아시아 마켓을 돌며 식품 트렌드를 관찰하고, 관련 기사와 자료들들 읽으며 유럽 소비자들이 원하는 맛과 이미지를 파악해갔다. 매일이 도전의 연속이었지만, 내 손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간다는 기분은 꽤 짜릿했다.
일을 시작한 지 9개월쯤 되었을 때, 부장님은 사무실을 프푸 외곽으로 이전한다는 갑작스런 소식을 전해왔다. 이유는 독일 현지 공장을 인수하게 되었고, 마케팅 사무실도 그곳으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두둥!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새로운 사무실은 차로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고, 나는 아직 자동차를 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사무실 이전 통보는 솔직히 당황스러웠지만, 어렵게 구한 직장이기에 결국 회사의 결정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긴 통근의 삶.
아침마다 기차를 약 1시간 넘게 탄 후, 역에 도착하고 다시 20분을 걸어야 했다. 도어 투 도어로는 무려 1시간 30분이 걸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무모했지만, 유럽에서의 첫 직장이었기에 이를 악물고 다녔다. 새 사무실에는 기존 독일 공장에서 일하던 독일 직원들이 있었고, 다행히 그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사무직 인원이 워낙 적다 보니,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 응대, 방문객 안내 등 업무 외적인 일들도 돌아가며 처리해야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다행히 추가 인력이 충원되었다.
돼지고기와 고수를 넣은 찐만두, 매운맛을 겨냥한 매운 만두, 베지테리언을 위한 두부야채 만두, 비건 만두, 그리고 한국식 양념치킨과 간장치킨 등등… 하나둘씩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며 제품 라인업이 점점 늘어났고, 매출도 그에 따라 꾸준히 증가했다. 매출이 오르자 사무실에도 새로운 동료들이 들어왔고, 내 연봉도 점차 올라갔다.
그렇게 2년이 흘러, 나는 마케팅팀 매니저로 승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팀에도 팀원들이 생겼다. 한국인, 독일인 각 한 명. 이제는 나 혼자 모든 걸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프로젝트를 분담할 수 있는 ‘진짜 팀’이 생긴 것이었다. 커리어 앞에는 녹색불이 켜져 있었다. 기다림 없이,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길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랑은 매일이 신호 대기 상태였다.
아헨에서 만난 남자친구 올리비에와는 2년 정도 장거리 연애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와 나는 독일과 벨기에, 국경을 사이에 두고 연애를 했다. 거의 매 주말마다 4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갔다. 금요일 저녁이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버스에 올라탔고, 토요일 하루만 온전히 함께 보내고 나면 일요일 오후엔 다시 프푸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야 했다. 만남의 시간은 늘 짧았다. 서로를 마주한 시간보다 기다린 시간이 훨씬 길었던 것 같다. 피곤한 하루 끝에도 서로의 안부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지만,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 가끔은 서로를 오해했고, 때로는 말 한 마디로 멀어졌다.
어느 평범한 금요일, 퇴근후 플릭스 버스를 타고 독일에서 벨기에로 향했다. 저녁 11시에 도착해서 겨우 짐을 풀었다. 그 다음날 나는 올리비에와 나무 숟가락을 함께 만들았다. 하지만 나무 숟가락을 깎다 그만 손을 다치고 말았다. 그날 따라 유난히 손끝이 예민하게 아파왔고, 자꾸만 반복되는 작은 부상들 때문에 마음도 점점 예민해졌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오른손을 조심스레 감싸며,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그에게 말했다.
“나 너무 걱정돼. 왜 이렇게 잘 안 되는 걸까. 왜 완벽하게 못 하는 거지…?“
그는 조용히 내 말을 들었다. 한참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갑자기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 어디 간 거지…?’
당황하고 있던 찰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거실로 올라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완벽한 순간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 거 같아. 인생이란 게 원래 완벽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지금이, 이 순간이 완벽한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을 잘 이해 할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가 계속 너의 손에 난 상처 때문에 완벽하지 않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그 완벽하지 않은 게 사실은 Real 진짜 인거 같아. 나는 너와 완벽한 삶이 아닌 진짜의 삶을 함께 살고 싶어“
그리고 그는 내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에메랄드 빛의 그의 눈동자를 쳐다 보니 이미 눈에 눈물이 그렁 그렁 맺혀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반지를 꺼내, 내 다친 손에 끼워주었다.
맑고 투명한 푸른빛의 아쿠아마린이 박힌, 그의 손으로 직접 만든 반지였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울었다. 말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난 너를 잃는 게 두려워. 하지만 이제는 망설이지 않을 거야. 나랑 결혼해 줄래?”
그를 바라보는 순간, 나도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응, 물론이지. 자기야… Yes, of course. H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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