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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롱 Mar 02. 2022

책이 나왔어요.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지> 

지난 해 여름에 나오기로 했던 책이, 이제야 겨우 나왔다. 혼자 마감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 브런치에 꾸준히 올렸다. 읽어 준 소수의 사람에게 고마울 뿐이다. 책 제목은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지>다. (제..제발 구매를..!!) 서문을 전하며, 출판사와의 계약을 위해 이제까지의 글을 삭제한다.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다. 단골바 뿐이랴. 어른이 되면 한강은 아니더라도 실개천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다. 뚜껑 열리는 람보르기니는 아니더라도 국민 차 한 대는 뽑을 줄 알았으며, 멋있는 할머니로 늙기 위해 차곡차곡 연금을 붓고 있을 줄 알았다. 아, 이것은 일장춘몽이라. 한여름밤의 꿈이라. 제자야,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덧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덧없는 꿈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지금 나는 서울의 작은 전셋집에 산다. 오 년 전만 해도 영혼의 발톱까지 쥐어짜 빚을 내면 서울 끝자락에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때 나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게 ‘내 집 마련’의 ‘내’자도 꺼내지 말라. 그리고 내게는 20만km를 달린 소중한 차, 토태지(토스카+서태지)가 있다. 2008년 서태지가 광고하던 6기통의 그 차다. 서태지 노래만큼이나 오래된 그 차는 20만km라는 주행거리 때문에 종종 택시로 오해받고는 한다. 3년 전 형부에게 50만 원에 넘겨받은 토태지는 내 꿈의 차와는 거리가 멀다. 노후연금? 국민연금에 돈을 부으면서도 나는 과연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그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의심한다. 코인과 주식으로 벼락부자가 된 이들을 보며, 벼락 거지가 된 나는 가끔 회의한다. 국민연금을 넣을 게 아니라 비트코인을 샀어야 했나봐.


내 나이 서른다섯. 요리 보고 저리 보아도 어른인 나는 그렇게 어릴 적 희망을 종이비행기에 접어 날려 보냈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집도, 차도, 노후 대비도 아스라이 사라졌다. 내게는 그런 소망을 가질 때 당연히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없다. 집이 없고, 뚱뚱한 지갑이 없고, 근사한 할머니로 늙기 위한 연금이 없다. 나의 노년에도 지구가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혐오가 놀이가 된 시대에 무사히 나이 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없다. 안전한 미래는 지난주에 길을 걷다 도둑맞았고, 눈부신 희망은 어제 드라이마티니와 바꿔 먹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면’에 대한 희망을 다 날려버리자 내 손에 남는 게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도 마지막 희망이 남아있던 것처럼.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지. 그래. 내게는 단골바가 남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를 다닐 수 있는 취향이 남았다. 무언가를 애호하고 아끼는 마음이 남았다. 이것은 나의 작고 이상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집도 절도 없는 주제에 취향만 있는 게 어디 나뿐일까?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돈이 없자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는 대신 월세방을 빼고 친구집을 여행한다. 미깡 작가 원작의 드라마 ‘술꾼 도시 여자들’의 세 여자도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술은 포기하지 못한다. 안 그래도 얇은 지갑을 더 얇게 만드는 취향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붙드는 이들은 현실에도 많다. 월급 300만 원에서 30만 원을 헐어 한 끼의 오마카세를 먹는 당신, 용돈 30만 원에서 3만 원을 빼내 최애의 포토카드를 사는 당신, 하루 3만 원의 생활비를 아껴 3천 원짜리 생초콜릿을 사 먹는 당신이다. ‘우리가 집 살 돈이 없지 술 사 먹을 돈이 없냐’라고 외치며 한 잔에 2만 8천원하는 칵테일을 사 먹는 너와 나다.

무언가를 애호한다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는 시대다. 한껏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자주 ‘욜로하다 골로 간다’거나 ‘가난한 애들은 이유가 있다’라는 말로 폄하된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 일에는 돈과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마시고 싶은 거 다 마시면서 집이 없다고 불평한다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면서 미래가 없다고 투덜거리다니! 좋아하는 마음에도 자격이 필요해진다. 근면히 노동하고 아껴 통장부터 두둑이 만들 것, 일단 적금부터 붓고 드립커피를 사 마실 것, 빈티지 인테리어는 먼저 집을 산 후에 할 것. 삶의 우선순위는 자본에 논리에 맞춰 줄을 선다. 집과 차가 없는 자, 칵테일을 탐하지 말지어다. 


‘아껴야 잘 산다’는 캐치프레이즈는 여러 번 이름을 바꾸며 휴식과 즐김의 자리에 노동과 절약을 채워왔지만, 애호하는 이들은 꾸준히 살아남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오래된 턴테이블을 사고 LP를 올리고, 일 년간 모은 돈으로 프랑스 와이너리 투어를 떠난다. 나는 바에 앉아 연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며 한 잔의 칵테일을 마신다. 나는 얼마 전 딸기에 취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단단함과 부드러움, 달콤함과 상큼함에 따라 딸기를 분류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단단하고 달콤한 금실 딸기에서는 복숭아 같은 향이 난다는 것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만년설은 딸기에 눈을 섞은 듯한 핑크빛을 띈다는 것도, 금실에서 느껴지는 달달함은 다른 딸기와 달리 꿀에 가깝다는 것도,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제철에 딸기 농장에 찾아가 막 딴 딸기를 맛보는 건 즐거웠고, 가까운 곳에 붙어 있는데도 농장마다 딸기맛이 다르다는 건 놀라웠다.


애호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깊고 넓은 세계가 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야만 보이는 세계, 손으로 더듬어야만 느낄 수 있는 세밀한 결, 여러 번 곱씹고 음미해야만 알 수 있는 기쁨이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 사람이 보는 세상은 이전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아무리 계속해도 질리지 않는다.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좋아해 본 사람은 알지 않을까. 그 마음으로 인해 세상이 모조리 달라진다는 걸.


무언가를 아끼고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을 응원한다. 애호하는 마음에 자격을 고민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게는 술, 특히 칵테일이 그렇다.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던 어린 나는, 자라서 칵테일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다. 출간 축하 파티에는 미모사를, 추운 겨울 밤에는 에그노그를, 일상이 지루한 날이면 페니실린을 마신다. 덕질의 끝은 창업이라고 했나. 이 바 저 바를 종종거리다가 결국 내 손으로 바를 차리기도 했다. 이 책에는 술에 대한 찬양과, 칵테일에 대한 예찬과, 그것들을 마시며 내가 만난 사람에 대한 에피소드가 담겼다.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이 무언가를 좋아하리라 마음을 먹는다면, 혹은 좋아하던 마음을 응원 받는 기분이 든다면 좋겠다. 당신이 그 이상하고 작은 세계를 지켜 나가기를. 


글을 쓰는 대부분의 이들이 그렇듯, 나도 원고를 완성시키는 동안 ‘내 글은 쓰레기야’와 ‘생각보다 괜찮은데’ 사이에서 메트로놈처럼 왔다 갔다 하곤 했다. 책을 낼 수 있었던 건 내가 끝까지 내 글을 사랑하게 도와 준 박이랑 편집자 덕분이다. ‘저도 출판에 대한 고민이 많답니다’로 시작한 그녀의 입담은 종내엔 ‘그래서 이 책은 의미가 있습니다’로 유려하게 끝나곤 했다. 타고난 이야기꾼 같은 그의 말에 나는 언제나 설득당했다. 애호하는 마음에 대한 글은 내가 썼는데, 정작 그 마음을 지켜주게 한 건 박이랑 편집자였다.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20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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