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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성킴 Oct 13. 2022

아무 조건 없이 부탁을 들어줬더니 생긴 일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어?"


 알고 지낸 지 10년쯤 된 A의 연락이었다. 물론 안될 것은 없었다. 나는 일을 하지 않으니 평일 오후에 시간이 많은 편이었고,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주 갑자기 온 연락도 아니고 물리적 거리가 있어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부산에 갈 때 가끔씩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동갑인 아이들이 있어서 함께 놀기 좋아서 A의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초록창에서 쇼핑몰을 하는 A는 요즘 고민이 많다고 했다. 라이브 방송을 하는 중인데 자꾸 악플러가 나타나서 분위기를 흐린다는 것이다. 그 악플러는 전 직원이라고 했다. 증거를 잡을 수는 없지만 전 직원이 확실하다는 그의 말에 그냥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상황을 알 수 없으니 그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악플러가 나타나면 받아쳐 달라는 것이 부탁이었다. 나는 댓글을 잘 쓰지 않는 사람이고 그런 라이브 방송에 댓글을 다는 타입은 더더욱 아니다. (라이브 방송이라는 것도 처음 보았다.) 처음에는 받아치는 댓글을 쓰는 것도 힘들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것이 영 찝찝해서 우물쭈물하는 내게 이건 100% 익명이고 초록창 측에서도 절대 잡지 못한다는 말로 계속해서 부탁을 했다.

 매주 평일의 어느 날, 1시쯤 시작하는 라이브는 한 시간 정도 방송을 했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몇 번 하니 할만한 정도가 되었다. 글쎄, 한 편으로는 이게 악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평범한 질문들이어서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쇼핑몰을 운영해 본 적도 없고, 라이브 방송을 해 본 적도 없으니 당사자의 속상한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사람은 다 다르니 내가 좋아하는 지인의 부탁을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들어주곤 했다.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라이브를 보게 되었고, 내 생일 즈음이었으니 몇 개월이 지난 셈이다. 그 사이 A는 범인이라고 확신했던 그 전 직원에게 직접적으로 하지 말라고도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직도 그 악플러는 주기적으로 나타났고, 그나마 내가 나타나서 그만하라고 받아치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스르륵 사라지곤 했다. A는 증거가 없어서 그 전 직원에게 아무런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화가 난 상태였고, 초록창 측에서는 이 정도 악플로는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초록창에서 일하는 A의 지인이 도와준다는 소식을 받았다. 나와 A는 정말 기뻐했다. (나는 드디어 이 짓을 끝낼 수 있구나 싶어서 기뻐했다.) 범인만 잡히면 이제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A의 깨톡 프로필 사진이 아주 자극적인 욕설로 바뀌어 있다. 두 차례 정도 바뀌었던 것 같다. 근래에는 정말 보기 힘든 저질스러운 욕설이었다. 요즘에는 프로필 바꾼 친구가 가장 상위로 올라오기 때문에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궁금한 마음에 A에게 깨톡을 보냈다. 보통 나는 먼저 연락하는 편이 아니다. 항상 A가 먼저 연락을 했다. 이번엔 궁금한 마음이 컸기에 먼저 연락을 했다.

 답장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A의 프로필 사진이 변경되었다.


'몰라서 묻냐 이 사이코패스야'

(이것은 내가 조금 순화해서 적은 것이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대체 범인이 누구길래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다가 저런 저급한 말을 적어가며 화가 난 것을 티를 내는가 궁금했다.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었나? 내가 모르는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에도 답장은 없었다. 하지만 자극적인 욕설은 프로필 사진뿐만 아니라 인별그램의 스토리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또한 내가 스토리를 업데이트하면 그 이후에 욕설이 가득한 스토리를 업데이트했다. 타이밍 한 번 더럽네.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A는 답장을 안 할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뭔가 찝찝한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다시 한번 깨톡을 남겼다. 범인이 잡힌 거냐고. 역시나 답장은 없었다.


'아직도 떠보냐? 전화해 이 것아'

(이것 또한 모든 욕설을 다 지우고, 아주 짧게 변형한 문장이다)


 다음 날 아침 확인 한 프로필 사진을 보고 나는 확신이 들었다. 아, 이거 나한테 하는 말이네.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내가 범인이라고 100%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심장이 벌렁 거려서 제대로 된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바쁘니까 끊으라는 말과 함께 전화는 끊겼다.

 이게 무슨 일이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사건의 전개였다. 물에 빠진 사람 꺼내 줬더니 뺨 때리는 격이었다. 도와 달라고 해서 도와줬더니 갑자기 내가 범인이라고? 그래, 그럼 범인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뭔지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그냥 억울했다. 도대체 갑자기 나를 범인이라고 몰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으나 도저히 A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대화가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갑자기 미쳐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런 사람과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10년이나 된 인연이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달라진 사람을 보니 오만정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프로필 사진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내가 혼자서 두 얼굴을 연기하고, 다른 쪽에 가서 분탕질을 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비밀을 폭로할 것이라는 류의 프로필이 몇 번이 변경되었다.

 우스웠다. 중학생도 아닌데 하는 짓이 어쩜 저렇게 유치하지? 이게 나이가 40 넘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인가 싶었다. 세상에. 내가 이런 사람을 언니 언니 하면서 잘 따르고, 친하다고 생각했다고? 고개가 저절로 절레절레 흔들렸다. 거기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뭘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혼자서 소설을 쓰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렇게 되었을까. 위에 언급한 '다른 쪽'은 또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딱 둘만 만나는 관계였다. 어떤 무리에 속하지도 않았을뿐더러 A와 나는 동시에 아는 사람도 없다. 어째서 저런 말이 나온 건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딱히 비밀이 없다. 남편과 친한 친구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더니 정신이 아픈 사람 같으니 그냥 무시하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이렇게 사람 하나 거르는 거라고, 손절해 버리라고. 하지만 해코지를 할 수 있으니 늘 조심하라고 했다.

 

 아직도 궁금하기는 하다. 나는 제주도에서 머물며 조용히 지내고 있는 가정주부일 뿐인데, 사업체를 가지고 운영하면서 몇 천명이 보는 라이브 방송에 얼굴을 공개하며 살아가는 저 사람이 나에게 갑자기 공격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다. 왜 갑자기 타깃이 전 직원에서 내가 된 건지 정말 궁금하다. 나는 그저 도와 달라는 부탁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도와주었던 사람일 뿐인데 어째서 나를 악플러라고 생각하는 건지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아, 그녀는 깨톡 답장도 하지 않고, 주어도 없는 말로 허공에 공격했다. 증거를 만들지 않고 있다. 나는 너라고 한 적 없는데? 를 시전 하는 것이다. )

 "나는 너라고 한 적 없는데, 전화 온 걸 보니 네가 범인이 확실하네."

 이게 일반적인 사람의 주장일 수 있을까? 내 주변에는 정상인만 있다고 자만하고 살았던 지난 시절의 나를 돌아본다. 인생이 너무 잔잔하다고 했던 나의 건방짐을 반성한다.

 처음부터 부탁을 거절했더라면? 아마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절을 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그것도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부탁은 더 거절하기가 어렵다.

 살다 보니 이렇게 하지도 않은 일의 범인으로 몰리는 억울한 일을 다 겪어 보는 경험을 다 해 보네. 아마 A는 자다가 이불 킥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길에서 나를 보면 부끄러워서 숨어버릴 수도 있다. 도대체 내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저런 짓을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생각의 끝은 늘 물음표로 끝난다. 처음부터 나와 대화를 했더라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근본 없는 사람처럼 혼자서 욕을 하고, 협박을 하고, 미쳐 날뛸 것이 아니라 나와 대화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만 남았다.

 A가 악플러라고 확신했던 그 전 직원을 꽤 오랜 시간 동안 괴롭혔던 것을 아는 나로서는 걱정이 되긴 한닼 이제 타깃이 내가 되었으니 A는 어떤 일을 어떻게 벌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약간의 걱정도 되는 것이 사실이다. “손절했으니 됐어! 이제 안 보고 살면 돼!”가 아니고 무슨 짓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을 하는 게 왜 나의 몫인가 또다시 억울함이 올라 오지만 앞으로 A가 하는 행동은 제 얼굴이 침 뱉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불쌍한 사람.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 없이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고 나서 남은 것은 이런 물음표와 안타까움, 그리고 사람의 한사람의 본성에 대한 의심 정도가 남았다. 앞으로 나는 누군가의 부탁을 아무 조건 없이 들어줄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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