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기지묘(理氣之妙)와 사회적기업의 숙명

지속가능한 사회를 꿈꾸는 사회적기업가의 균형감을 위해

by 물꿈 Mar 03. 2025

한국 사회 안에서 사회적경제의 출발 시점을  잡아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시행된 2007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사회적기업들이 등장했음은 사실인  같습니다. 이때부터 다소 낯설었던 사회적경제의 개념이 정부 차원에서 폭넓게 논의되고 관련 지원도 함께 이루어졌죠. 그러나 그로부터 20 가량이 흐른 지금의 사회적경제 영역이 우리 안에 얼마만큼 깊이 자리 잡았는가에 대해 질문한다면, 여전히 고개가 갸우뚱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인  같습니다. 왜냐하면 동종 업계에 근무하면서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회적기업가들의 목소리를 최근들어  자주 듣고 있거든요. 게다가 초기 이런저런 지원금이 있을 때는  문제가 없어 보이던 사회적기업들도  지원이 종료된 후에는 온전한 자립 구조를 가지지 못해 활동을 접는 경우도 제법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당연히 내외부적 환경 변화에 기인하고 있겠지만, 사회적기업이라는 독특하고도 이중적인 구조 안에서 비롯된 부분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회적기업이란,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하여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판매 등 영업활동을 하는 기업’을 칭합니다. 이상의 설명과 같이 사회적기업은 영리적인 수익창출 방식을 가지고 비영리적인 목적성을 추구하는 곳이죠. 굉장히 멋진 개념입니다만 역으로 생각하면 좀 달리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일반 영리기업은 수익증대라는 조직 미션을 잘 구현하면 되고, 사회복지기관은 기금배분이라는 조직 미션을 잘 구현하면 되는 데에 반해 사회적기업은 사회적 미션을 추구하지만 그 방법론을 영리적으로 취해 그 영속성을 꾀해야만 하는, 즉 한 마리 토끼도 잡기 힘든 세상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이중고를 일상적으로 겪어야 한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 특수성 안에서 평소 사회적기업가의 고민과 어려움은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미션을 위해 좋은 사업적 기회를 놓친 경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영리적 이득을 위해 조직 미션의 영역을 어느 정도 뒤로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있었겠죠. 모든 사업이 수익과 목적 모두를 100% 충족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흔치 않겠죠.     


그렇기에 사회적기업가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적지 않은 현실 타협의 유혹에 시달립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며, 그 안에서 존속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인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아마 주변에서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존과 존속이 최우선시 된다 하더라도 사회적미션을 도외시하는 사회적기업이란, 사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조직의 사회적 미션을 포기하는 순간, 법적인 측면에서라도 사회적기업으로서의 타이틀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이상 추구를 위해 아름다운 실패를 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고 한다면 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시점에서 사회적기업의 건강한 균형감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기업은 비영리기관과 영리기관 사이에 위치해 영리적 사업 방식을 가지고 비영리적인 사회변화를 꿈꾼다. ⓒ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이와 같은 논의를 다양한 사회적기업 사례와 여러 사회적경제 이론을 통해 살펴볼 수 있겠지만, 이상과 현실의 조화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우리네 선조들의 목소리를 잠시 살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균형 감각이라는 의미를 중심에 두고 조선 성리학 세계관 안에서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졌던 율곡 이이의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개념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죠.      


율곡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16세기 조선을 살아간 실천적 지성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당시 조선은 성리학의 전통 아래 모든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그 안에서 발견하려고 했죠. 즉, 감각 세계 이상의 원칙과 그 이하의 방법론 모두를 하나로 통일하여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성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 고리타분하고 관념적이라 생각해 고개를 젓는 이들이 다수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서도 치열한 경세의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율곡 이이는 건국의 동력이 서서히 무뎌지고 있던 조선 중기 시대를 살면서 자신만의 성리학적 관념을 동원해 사회 변화(更張)를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고요.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理)’와 ‘기(氣)’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고 변화된다고 보았습니다. 그 중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론’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와 그에 맞는 행위를 하는 도덕적 사회를 이상으로 하여 그 가치를 지향하였습니다. 반대로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감정에 충실한 사회를 옳은 사회라 보며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가치를 지향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리학적 해석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달라지게 됩니다. 퇴계 이황과 같은 학자는 우리 마음속에 ‘도덕적 이(理)가 발동함에 기(氣)가 그것을 그대로 쫓는 것’이라 말하며 그것을 다소 층위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즉, 도덕적 이상을 더 중시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율곡이 언급한 ‘이기지묘’의 가치는 사실상 ‘이(理)와 기(氣)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로서, 다시 말해 성리학과 경세적 실학이 하나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기지묘는 우리에게 상보성의 원리를 제공해 줍니다. 이(理)가 없는 기(氣), 기(氣)가 없는 이(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서로 보완해야 한다는 뜻이죠. 또한 나와 마주 서 있는 너를 싸워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나의 결핍을 보완해 줄 고마운 동반자로 인식하는 것, 의견이 충돌할 때 다툼이 아니라 내 의견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시각에서 상대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공존의 가능성과 평화와 질서를 추구함에 있어서 ‘상호호혜’라는 사회적경제의 가치와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소 인위적일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이기지묘의 가치를 사회적경제 영역에 대입해 볼까요? 이(理)를 사회적기업이 추구하는 사회적 이상이라 한다면, 기(氣)는 현실적인 사업 원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理)를 정신적 가치와 윤리도덕이라 한다면, 기(氣)는 물질적 가치와 경제 영역에 닿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기지묘는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의 조화를 의미하며 현실과 이상의 조화, 이론과 실천의 조화, 윤리와 경제의 조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할 수 있겠죠.      


율곡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16세기 조선을 살아간 실천적 지성이었다. ⓒ 오죽헌 시립박물관


꼭 사회적기업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가치 선택에 대해 늘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균형감을 잃고 자칫 하나의 가치에 매몰될 때가 있습니다. 이는 곧 편견으로 이어질 수도 있죠. 이와 같을 때에 우리는 다시금 율곡이 말하고자 하는 조화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을 말하지만, 하늘을 망각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단순히 윤리 도덕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주의 민생을 걱정하며,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런 율곡의 목소리는 시대를 초월해 현재에도 여전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理)의 가치를 신성시하던 성리학적 세계에 반발하며 실(實)을 이야기 했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유일한 가치로 떠받들어지는 것 같은 지금의 세상에서 사회적기업가들이 외쳐야 할 이상의 목소리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이념일지라도 현실에 기반해야 하고, 어떠한 이론일지라도 실천성을 가질 때 온전할 수 있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하늘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우직함이 지금의 사회적기업가들에게는 꼭 필요하다 할 수 있겠죠.     


그렇기에 지금의 사회적기업가에게는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지속가능함을 위한 실익을 애초부터 서로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큰 덩어리로 보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한 이상만으로는 사회적기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 없는 현실 안의 사회적기업은 자본에 종속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의 가치에 압도되지 않는 균형 감각은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요? 다소 원론적인 답이긴 해도 그것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사회적기업 개별 부서마다 수익성과 목적성을 주로 다루는 부서들이 있을 텐데요, 부서마다 사업 진행 과정 가운데 그 반대 지점에서 자주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보는 것이죠. 수익부서에서는 사업의 초심을 돌아보고(‘이러한 사업적 결정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가치의 확장에 도움이 되는가?’), 목적부서에서는 조직의 실익을 따져 묻는(‘이러한 업무 수행 방식이 조직의 운영 지속성에 도움이 되는가?’) 역의 방식을 수행하면 좋겠습니다. 혹은 조직적 여유가 된다면 그러한 구도를 사전에 고려한 부서구성이나 그 역할을 의도적으로 부여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실무단위 안에서의 고민의식과 서로 간의 치열한 논의로부터 사회적기업의 건강성은 그 균형을 잡고 유지될 것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 옛날 율곡 선생은 교조화되는 조선사회의 사상 세계 안에서 실리와의 조화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인식론의 학파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조선사회를 지금과 비교해 보면 어떤가요? 점점 더 실리의 영역이 비대해지는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여전히 누군가는 이상에 대해 말하며 그 균형을 잡아가자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와 같은 표현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흡사 그 가치가 저울의 양 끝에 있는 것처럼 구조되어 있는 것이 아닌, 애초에 그것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율곡이 이(理)와 기(氣)가 연결됨이 단순히 합(合)이라 하지 않고 ‘묘합(妙合)’이라 말한 것은 그것이 성질이나 종류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에 의해 그것을 갈라놓아 구별(distinction)할 수 있으나, 서로 나누어 떨어뜨릴 수 없는 분리(separation)불가 상태에 있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는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되지만 부부일 때는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처럼 분리되지 않는 것을 그는 ‘이기지묘’라 칭하였고, 그 시선과 가치는 모든 사회적경제 조직과 일원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듯합니다.      


                            

                                                             

[ 참고 문헌 ]

- <이율곡 읽기>, 황의동 (세창미디어 / 2013)

- <유학자의 동물원>, 최지원 (알렙 / 2015)

- <조선, 철학의 왕국>, 이경구 (푸른역사 / 2018)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omn.kr/2cev0)

작가의 이전글 '커먼즈'로 바라보는 세상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