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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희 Aug 25. 2021

처서의 아침 공기

 창문을 여니 근래에 느껴본 적 없는 시원한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하늘은 지금 연한 회백색 구름 이불을 덮고 있고 가까이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창가에 닿으니 어김없이 할머니 댁의 아침이 떠오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부터, 아니 아빠의 아빠가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이사란 걸 한 적이 없는 우리 할머니 댁은 김 씨 집성촌에서 100년 넘게 터를 지키고 있는 시골집이다.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토속적인 기와집 외형은 없어 진지 오래고, 나도 그 모습이 가물가물해져 가끔은 사진을 찍어두지 않은 아쉬움과 옅은 자책감마저 든다.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아빠의 6남매와 나의 사촌들은 주말이면 그곳에 모여 할머니 할아버지와 밥을 지어먹곤 했다. 머릿수가 어찌나 많은지 제사 지낼 때나 쓰는 널따란 상을 두 개나 펼치고 심지어 그것도 비좁아 그 옛날 결혼식 사진 촬영 때처럼 몸을 사선으로 돌려 앉아 밥을 먹었다. 그 모습이 마치 피난민 내지는 흥부네 자식들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보다 눈치 빠른 피부가 먼저 반긴다. '아침 공기가 눈에 띄게 쌀쌀해졌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으스스한 몸을 감싸 쥐게 하는 이 계절. 이 것을 느끼자면 할머니 댁 추석 당일 날의 아침으로 별안간 타임슬립 한다.


 우리 집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주방에 둘러앉아 말도 안 되는 양의 송편을 빚었다. 동네 친인척들이 모두 먹고도 남을 만한 제사 음식을 만들고 저녁이 되면 어른들은 거나하게 술을 잡쉈다. 애들은 윷놀이를 하며 승부욕에 정색도 했다가 윷판 바깥으로 윷을 던지는 동생을 보며 배꼽을 잡기도 했다. 그러다 더 밤이 깊어지면 두 개의 장롱에 쌓여 있는 형형색색의 목화 이불을 잔뜩 꺼내 기계처럼 당연한 듯 바닥에 펼쳤다. 다들 집도 멀지 않으면서 도대체 왜 제비 새끼들처럼 한 데 모여 자는지, 순순히 따르면서도 나는 한편 이해가 안 됐다. 안 방에 대여섯 명, 작은 방에 서너 명, 거실은.... 가관이었다.


 이 행위가 이해 안 되는 가장 첫 번째 원인은 화장실 때문이다. 해가 지날수록 시설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편의가 떨어지고 따뜻한 물도 잘 안 나올뿐더러 무엇보다 대기표 순번이 최소 5번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일어나 칠흑 같은 새벽에 화장실을 독차지하거나, 벌써 다들 일어난 환한 8시쯤에, 작은 아빠들한테 욕 한 바가지 먹는 것을 감수하며 마지막 순번으로 일어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라고 매번 생각했지만 둘 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다.


 내 잠자리는 주로 안방이었고 미닫이 창호문 밖으로 북적북적 어른들의 아침 맞는 소리가 들리면 적당한 순번으로 눈이 떠졌다. 곧장 일어나긴 싫어서 눈만 떴다. 소리를 듣자 하니 음주를 한 어른과 하지 않은 어른의 구분 없이 모두들 꼭두새벽부터 일어났었는데 나도 어른이 돼서 밤새 술을 먹어본 결과, 산짐승 같은 그들의 스테미너는 대체 어디서부터 온 건지 영원한 미스터리다.


 나는 안방에서 눈을 뜨면 순간 말할 수 없는 이상하고 야릇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감정을 분석해봐도 어떤 단어가 이 감정을 대체할 수 있을지 결국 찾지 못해서 난 엄마나 그 누구에게 한 번도 이 감정을 꺼내 본 적이 없다. 그러다 한참 뒤 ‘시댁' 이란 곳에 가서 잠을 자고 일어난 날 그 느낌을 오랜만에 마주했고 이제는 그게 뭔지 알게 됐다.


 어제 내내 얼굴 보고 떠들며 제법 친해졌다 생각했지만 자고 일어나 새 걸로 교체된 눈으로 공간을 두리번거리니 다들 누구신지.... 낯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 살 부대끼며 누워있다는 사실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게 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와는 달리 내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그러니까, 태어나보니 영락없이 '가족'이라고 묶인 사람들과 1년에 두어 번 한 데서 자는 이것이 어린 나에게는 참으로 생경하고 이상한 명절의 한 장면이었던 거다.


 그러나 저러나 일어나야만 한다. 작은 아빠들   사람이 반드시 '그만 일어나!' 쩌렁쩌렁  소리로 깨우는 것을 절대 누워서 듣고 싶지가 않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이불을 갠다. 미닫이 문을 달그락, 열고 거실로 나가면 그래 바로 이거다. 9 추석 날만의 아침 공기!  일어나 몸이 잔뜩 웅크려질 만큼 춥고 귀찮은 기분. 낯선 마음을 감당해 내느라 정신이 없는와중다들 분주하게 각자  일을 하는 뒷모습과 백색 소음 탓에 점점 ‘편안 가까워지는  기분. 까치도 동네 친척들과 명절을 쇠는지 삼삼오오 날아다니며 울어대고 동네 어귀에는 지붕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그림도 편안함에 한몫을 더한다. 오늘은 동생들과 장대 갖고서  따러 가야 하나, 동네에서 제일  고목나무 밑에서 땅따먹기를 할까, 부산스럽지만 상쾌한 명절날만의 아침 공기가 오늘  아침  그립다.


 오래간만에 그 시절의 구수함을 떠올려 준 아침 공기에 신세를 진 기분이다. 그때의 나는 화장실도 마음에 안 들고 다 같이 모여자는 새벽 기상도 귀찮았지만 결국 지금 난 그날의 전부를 이렇게 반가워하며 곱씹게 됐다. 엄마 아빠들도 나처럼 각자 마음에 새겨진 ‘공기’가 있겠지. 그래서 우리를 한 데 모았을지 모르지. 지금 다 같이 모여 자도 그 냄새와 그 소리, 그 기분일까. 만약 그런다면 할머니가 하늘나라에서 흐뭇하게 내려다보실 것 같다. 이번 추석 즈음에는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오리온 카스타드랑 막걸리 사들고 뵈러 가야겠다. 차가워진 공기 내음을 맡으며 그 시골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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