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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gon Nov 19. 2020

하와이의 남자 셋 여자 셋

호스텔의 룸메이트들

"여기가 고은 씨가 사용할 방이에요."


나는 호스텔로 거처를 옮겼다. 내가 지내게 될 곳은 방 2개에 부엌 하나 화장실이 하나인 공간으로, 호스텔에서 일하는 스테프들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방 두 개 중 한 개의 방엔 2층 침대 두 개에 남자 셋 여자 한 명이 사용했고, 내가 사용하는 나머지 하나의 방은 나와 다른 여성 한 명이 사용하는 방이었다.


'남자 셋, 여자 셋? 하와이 판 '남자 셋, 여자 셋' 아니, '프렌즈' 찍는 거 아니야?'


외국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너무 설레었다. 왠지 시트콤에서 벌어질 법한 일들이 벌어질 것 같아 흥분이 됐기 때문이다. 말이 안 통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로맨틱한 요소로 느껴졌다.


내가 지낼 방은 단출했다. 그동안 하와이로 여행을 갈 때마다 사용하던 호스텔이었기에 호스텔의 구조와 분위기는 내게 익숙했다. 그래도 이번엔 손님이 쓰는 방이 아닌 스테프들과 함께 쓰는 방이라고 하니 하와이와 더 친밀한 관계가 된 것 같았다.


이제 한동안 머무르게 될 곳에 지긋지긋한 짐들을 옮겨두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철근으로 만들어진 2층 침대와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서랍장과 거울, 붙박이장과 협탁 그리고 스탠드 하나가 방안에 배치된 가구 전부였다.


'우잉이이잉이이'


아! 작동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요란하게 탱크 소리를 내는 에어컨도 빼먹으면 섭섭하지. 시끄러운 소리와는 달리 힘없는 방귀처럼 바람이 영 시원찮은 그런 에어컨이었다.

대충 짐들을 정리하고 침대 위에 몸을 누이자 이 곳에서의 인연들이 떠올랐다. 이 호스텔을 이용하던 5-6번의 여행 동안 만났던 특별하던 인연들...


첫 번째 여행 때 나의 룸메이트는 환갑이 넘으신 엄마였다. 엄마와 이 호스텔에 있는 4인 1실을 사용하였었는데 엄마가 불편하실까 봐 걱정됐던 나의 우려와는 달리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신기해하시며 재밌어하시던 기억이 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영어도 모르면서 용감하게 엄마를 모시고 왔었는데 한국인 투숙객은 전무했던 이 호스텔에서 엄마와 난 캐나다 여성과 일본 여성과 함께 같은 방을 사용했었다. 제발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길 바라면서. 그런데 첫날부터 그 꿈은 깨졌다. 밤에 자고 있던 나를 누군가 깨웠다. 같은 방을 사용하던 일본인 투숙객이 었는데


"I'm gonna leaving momorrow early morning" (내일 아침에 나는 일찍 떠날 거야.)


라고 하였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 '오케이 오케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는데 좀 시끄러울 거야. 양해를 구할게' 정도 됐던 거 같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잔뜩 긴장을 해서는 무조건 '오케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 내게 엄마께서는 방금 저 여성이 무슨 이야기였는지 물어보셨다.


"몰라. 여기 살 거래."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을 하면서도 나 역시 '그게 무슨 말이야 방귀야' 싶었다. 그때까지 내 사전엔  '리빙(떠난다는 뜻)'의 뜻은 '산다'라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어가 짧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괜히 짜증 나서 한껏 흥이 나였던 엄마께 세상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그냥 영어도 못하는 딸을 의지하고 계신 엄마를 보니 더 똑똑한 자식이 못 되어 드려 짜증도 나고 그런 엄마가 안쓰러워 보여 속도 상하고... 이래저래 엄마께 짜증을 참 많이 냈었는데... 그때는 내가 왜 그랬었나 후회가 됐다. 호스텔에서의 엄마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돌았었다. 아마도 어른들을 어려워하지 않고 친절하게 다가오던 외국 젊은이들의 모습과 그들이 가져다주는 풋풋함에 엄마 역시 젊어지는 기분을 느끼셨던 거 같다.


두 번째 여행에서 내 룸메이트는 캐나다에서 온 여성이었다.  그녀는 호스텔에서 알게 된 독일 남성과 사랑에 빠져 매우 행복해했었다. 행복해하던 그녀에게 '그 남성의 어디가 좋냐' 물으니 '지금까지 내가 만난 남자들은 다 나쁜 남자였지만 이 남자는 다른 남성들과는 다르게 다정하고 재밌고 무엇보다 키스를 잘한다'라고 대답하던 게 너무 인상적이었다. '아... 서양 여성들은 이렇게 솔직하구나' 싶어 멋있었다. 그녀는 며칠 뒤 그 독일 남성과 함께 '빅아일랜드'에 놀러 가느라 방을 비우게 됐으니 걱정 말라는 쪽지를 내게 남기고는 떠났었다. 나는 그녀의 화끈함이 멋지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다. 그런데 '빅아일랜드'를 다녀온 며칠 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홀로 어두운 밤 호스텔 현관 앞에서 병맥주를 마시며 훌쩍이고 있었다. 왜 그러냐 물으니 그 남자가 먼저 떠나게 됐다며 슬퍼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보통의 위로를 하고는 우리는 날이 밝자 함께 와이키키 바닷가로 갔다. 그녀와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였다. 우리는 '하와이가 너무 좋다'며 이 곳에서 살고 싶다는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다에 동전을 던져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해!"

"한 번 해볼까?"


캐나다 친구가 말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바다로 달려가 동전을 던지며 "내년에 또 오자!"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 동전 소원이 효력이 있었던 건지 정말 내가 다시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가장 최근의 인연은 이 호스텔에서 가장 마지막에 묵었을 때 만났던 인연으로, 호스텔 사장 오빠를 도와주고자 조식 서비스를 하면서 만났던 인연이다. 열심히 일하고 있던 내게 누군가 다가와 "운동화가 예쁘다!"라고 한 마디를 툭 던졌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키가 큰 백인 남성이었다. 금발의 곱슬머리에 순수하게 생긴 게 인상적이던 남성이었다. 나는 며칠 뒤 홀로 와이키키 바닷가에서 태닝을 하고 있었는데 무심코 둘러본 모래사장에서 홀로 책을 읽고 있던 그 남성을 다시 발견하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와이키키 내 가장 저렴하고도 맛 좋은 우동집을 갔는데 그 남성이 이번에도 또 내 옆에 앉아 홀로 우동을 먹고 있던 것이다.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어 반가운 마음에 "하이!"라고 말을 꺼낸 것이 인연이 되어 친구와 나는  콩닥콩닥한 나름의 데이트(?)를 했었다. 남성은 오토바이를 빌려 함께 와이키키 라이딩을 가자고 하였다. 혹시 나쁜 사람이면 어쩌나 걱정도 됐지만 백인 남성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타 와이키키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의 뒤에 앉아, 낯선 서양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아름다운 와이키키 경치를 구경하였던 적도 있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은 다 공짜야. 세상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다 공짜지."


떠나는 날 와이키키를 걷던 그가 했던 말이다. 남성은 떠나며 내게 초콜릿과 쪽지를 주었는데 그 쪽지에는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환상의 섬 하와이를 떠나 다시 일상으로 가자마자 편지에 적혀있던 '있을 거야'는 '없을 거야'가 되어 버렸다. 평생을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만 했던 내게 이 인연들은 너무도 특별했다.


'또 어떤 특별한 인연들을 만나게 될까...'


또 다른 만남에 부푼 기대감을 안고 잠시 누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해 보았다.


"하이! 아임 나타샤!"


얼마쯤 지났을까 살짝 선잠이 든 나를 방문 열리는 소리가 깨웠다. 내 눈 앞에는 늘씬하고 개성 있어 보이는 백인 여성이 서있었다. 그녀는 이 침대의 1층 에서 거주하게 될(?) 나의 룸메이트였다. 그녀는 이 호스텔에서 '하우스키핑(청소)'을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호스텔 사장의 친한 동생이라고 날 소개하고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쏘-쿨' 하게 '알겠다'라고 하며 바로 서핑 복장을 챙겨 입고는 방을 휙 나갔다.


'남자 셋, 여자 셋'을 꿈꾸는 나에게 찬물이라도 끼얹는 듯,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스테프들끼리 사실상 자주 마주칠 일은 없었다. 나를 뺀 나머지 스테프들은 일을 하느라 바빴다. 심지어 투잡을 뛰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운 좋으면 일주일에 한 번 화장실 문 앞에서 마주치는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호스텔에 가자마자 바로 '조식 서비스'에 투입되고 싶었지만 호스텔 사장 오빠는 그냥 쉬라고 하였다. 그러나 친구도 없이 쉬기만 하기에 나는 슬슬 따분하기도 였하고 '무전취식'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였다.


 "고은 씨! 이번 주말 노아랑 같이 '마노아 폭포'에 다녀올래요?"


너무 바빠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던 사장 오빠가 어느 날 나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였다.


스테프 중에 '노아'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호스텔 버스'담당이었는데 '호스텔'은 특성상 여행을 홀로 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런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호스텔에서는 '섬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을 하였는데 그 담당을 노아가 하였던 것이다. 사장 오빠는 나에게 따라가서 여행객들 사진을 찍어주면 된다고 하였다.


버스 안은 냉기로 가득했다. 혼자 온 사람도 있고, 둘이 온 사람도 있었는데 그렇게 모아놓은 버스 안은 어색한 공기로 가득 찬 것이다. 모두 외국인인데 나 혼자 한국인인 데다가 영어도 서툴러 몹시 긴장이 됐다.


'렛츠 테이크 어 픽쳐!'


버스 안에서 나는 머릿속으로 이 말만 계속 대뇌 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말은 이것뿐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버스가 멈췄다.


버스에서 담소를 나누며 친구가 된 사람도 있고, 원래 친구와 함께 온 사람들도 있고... 혼자 폭포를 오르는 사람은 결국 나뿐이었다.


"우와!"

하와이, 호놀룰루 하면 와이키키 바닷가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였는데, 눈 앞으로 마주하게 된 수풀이 우거진 '마노아 폴'의 첫인상은 태고적의 자연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경험해 본 이런 분위기는 고작 놀이동산 '아마존 익스프레스'에서 느꼈던 것이 전부였다. 어디선가 공룡이 튀어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혼자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다 어디쯤 지났을까, 나의 본분이 떠올랐다. 나는 슬그머니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을 찾아가 본분을 다하여 수줍게 말을 건넸다.


"렛츠 테이크 어 픽쳐!"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 해 하였다.


'아차차! 발음!!!' 나는 사람들에게 몸으로 말하였다.


 '내가 너를 찍어 줄게!'


"오! 오케이!! 땡큐!"


역시, 만국 공통어는 바디 랭귀지였다! 몸으로 말하니 모두들 찰떡 같이 알아듣고는 포즈를 취하였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시도하니 다음은 쉬웠다. 나는 슬슬 우리 호스텔에서 온 사람들을 찾아가 '테이크 어 픽쳐!'라고 하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처음엔 부끄러워하던 사람들도 슬슬 무장해제되는 듯 보였다.


'먹히는군!'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나는 나는 개그맨 버릇 못 버리고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천연덕스럽게 혹은 약간은 푼수 같기도 하게 행동하며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점프도 해보라고 하고, '세이 김치!'라고 시키며 소심한 애국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서로 찍고 찍어주며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마노아 폴 투어를 마치고 다시 호스텔로 돌아오는 버스 안의 공기는 처음 출발하던 버스의 공기보다는 훨씬 따뜻해져 있었다.



"왓츠 유어 네임?"


노아였다. 운전을 하는 노아의 눈빛도 출발 때와는 달랐다. 노아가 이제야 나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이. 아임 난다."


그렇게 나는 그날 이후 노아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조금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스테프 방 사람들끼리는 원래부터 다들 친했다. 그들은 함께 지낸 시간도 오래됐고, 말도 쉽게 통하니 원래 친했던 모양이다. 내가 본 책에서 나온 외국 사람들은 늘 친절하고 다 나이스 해서 먼저 다가오기도 하였는데 사실 외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사람은 누구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어색함도 느끼고 탐색전도 필요하긴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그런데 난 그들이 먼저 나에게 다가와 줄 거라며 홀로 '드라마 주인공 병'에 걸렸던 모양이다. 내가 무슨 '김태희, 전지현' 도처럼 수려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아쉬운 사람이 먼저 가서 비벼야 하는 거였다. 비록 난 언어는 서툴렀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 반갑게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앞으로는 그것을 무기 삼아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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