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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gon Oct 30. 2021

하와이에선 배짱이 처럼 살아도 해피엔딩?

다르게 살아도 되기도 하겠다.

30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나름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자부하던 나였다.

허나 하와이에서 약 2년 정도 살며 만났던 사람들의 다양함에 비하면 한국에서의 자부심은 주머니속 휴지 마냥 수줍게 찌그러져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것은 비단 한국에서 만나지 못했던 다인종을 만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인 민박집에서 만난 한인 인연들만해도 각자의 다양한 사연들이 있었다.


한인믹박에서 약 두달간 머물던 시절이 있었다. 그 방은 8인이 1실에서 지내는 방이었다.

여자만 사용하던 방으로 내부 구조는 흡사 군대 내 내무실 같았다.


그곳에서 두 달을 머문 사람은 내가 유일했고 다른 사람들은 거의 1주일 정도가 최장 투숙 기간이었기에 그 곳에 있는 동안 흡사 나는 말년병장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투숙객들은 대부분 떠남에 대한 아쉬움과 남겨진 날 부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내게 떠날때 마다 무언가를 주고 갔는데 거의가 라면, 햇반 등 먹으려고 챙겨왔다가 들고가기엔 짐이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나에게는 너무도 일용할 양식이었기에 익숙한 메뉴여도 늘 고맙고, 나도 모르게 떠나는 이들에게서 일용할 양식을 기대하고 있었다.


난 그것들을 받을 때 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그저 긴 여행자일 뿐이면서도 하와이를 떠나 아쉬워 하는 그들의 눈빛을 보며 그들을 위해서라도 하와이를 꼭 지키겠노라는 어이없는 사명감 같은게 들었다.


민박집은 10시 면 취침을 해야하는 룰이 있었는데 그 언저리 시간 부터 우린 모두 소등을 하고 서로를 위해 침묵을 지키곤했다.


가끔 어둠속에서 서로 잠도 안 오고 들뜬 마음들이 통하는 밤이 되면 서로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 정도를 나누기도 했는데, 우리가 머무는 곳이 미국이기도 하고 각자 쉬려고 모였다는것을 알기 때문일까? 사적인 질문은 쉽게 하질 않는 고유한 배려의 문화가 있었다.


허나 이야기를 주고 받다 흥이 오르면 본인이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하다 왔는지, 요즘 고민은 무엇인지... 그러다가 옳다커나 말이 통한다 싶으면 연애 이야기 부터, 가정사까지 좔좔좔 (어차피 다시는 못 만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더 가볍게) 나누는 위험한 밤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 곳에서 두달간 머물며 만났던 사람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몇명 있는데, 첫 번째로는 하와이의 위치한 미국 부대로 연수를 받으러온 군인 언니다.


언니는 다들 놀러 와서 깨벗고 다니는 하와이에서도 늘 군복을 단정히 입고 이른 아침 한식을 꼬박꼬박 정갈하게 차려 먹고는 연수를 받으러 민박집을 나섰다. 혼자 하와이로 연수를 온 언니가 멋있어 보이면서도 따분해 보이기도 하였다.


언니는 민박집에서 독방을 사용했었는데, 어느날 언니와 조금 길게 대화를 나눌수 있던 날이 있었다. 원래는 군인들의 숙소가 따로 있지만 남편과 함께 지내려고 이 민박집을 예약했다고 하였다. 근데 남편분이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못오게 되어 혼자 지내야됐다고 하였다. 안타깝다고 위로해 주었다.


언니는 사실 이 곳에 오기가 많이 망설여졌다고 하였다. 난 남편이 없어서 그런가 싶었는데 언니가 바로 말하길, 하와이 오기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꽤 긴 결혼 생활 중 정말 어렵게 임신이 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홀로 하와이를 와야하는 것이 걱정됐다고 하였다. 그러나 언니는 국가가 부르니 왔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는 그저 '에구 어쩌나...안타깝다.'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임신을 하고 나니 그 언니의 선택이 얼마나 굉장한 선택이었는지,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또한 신나게 놀러만 오는 하와이 인줄 알았는데 일을 하러도 오는 곳이라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많은 여행자들에겐 천국 같던 하와이가 언니에겐 외롭고 두려운 곳이었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든다.


이제와서 후회 되는 것은, 매일 아침 홀로 태아를 위해 타지에서 건강한 식사를 준비하던 언니를 좀 더 이해하고 도움주지 못했던 것이다. 달걀이라도 한 판 사다 줄걸...


짧은 만남이었지만 군복을 입고 환하게 웃던 언니가 가끔 떠오른다. 그때 언니의 뱃속에 있던 아기는 꽤 컸을것이다. 언니도 가끔 그 시간이 떠오르겠지?


기억에 남는 두 번째 친구는 내 바로 맞은편 침대를 쓰던 친구였다.


어학원을 가느라 매일 아침 일찍 부랴부랴 준비해서 나서는 나와는 달리 늘 여유롭게 누워서 내가 나설때 마다 "아. 어학원 가세요? 잘 다녀오세요. 부러워요!" 라며 침대에 누워서 인사를 던지던 친구였다.


그녀는 늘 내 어학원 하교시간 몇시간이 지나서야 숙소에 들어왔는데 숙소에 들어 올 때 마다 항상 양 손에 쇼핑백이 하나가득 들려 있었다. 그 모습과 그녀의 풍기는 체취가 여행자임을 말해주고 있어서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내 기분이 상큼해 지는것 같았다.


그녀는 생기있는 여행자의 모습으로 쇼핑을 참 많이 하였고, 비싼 레스토랑에 잘 다니며, 영어도 잘 하였다. 그런 모습이 매일 찌는 더위 속에서 어학원을 다녀야 하는 나와는 너무 달라 보여 부러웠다.


그녀 역시 홀로 여행을 왔지만 사교성도 좋아 옆 침대를 쓰는 분과 금세 친구가 되었고, 민박집에서 그녀들의 존재는 더더욱 커져만 갔다.  


내 상상속의 그녀는 부잣집 막내딸에 영국 유학을 마치고 사업구상 혹은 부모님 사업을 물려 받기 위해 시장조사를 하러 온 사람이었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고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오만가지였지만 그녀는 쉬러 온 사람이었으니 난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고 원래 부터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인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귀는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방 제일 끝 침대에 예쁘게 생긴 어린 친구가 머물고있었다. 그 친구는 낮에는 잠만 자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외출을 하고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오곤 하였다.


당시 같은 방을 쓰던 사람들은 아침에 그녀가 혹여나 잠에서 깰까봐 큰 소리를 내지 않고 깨금발이로 다니며 말을 할 때도 쉬쉬 거리며 말을 하곤 하였다.


그녀의 늦은 귀가가 계속 이어지자 방 안에 여인들은 그녀가 슬슬 걱정이 되었다. 하와이가 아무리 미국 내에서 꽤 안전한 곳이라지만 그래도 예쁘고 여리여리한 동양 여자 혼자 다니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밤, 그날도 예쁜 친구는 12시가 다 되도 숙소엘 들어오질 않고 있었다.


"아... 끝에 누운 분 아직도 안 오신거예요?"


고요한 침묵을 깨는 목소리는 내 앞 침대를 쓰던 그녀였다.


"그러게요. 걱정되네요..."

"매일 새벽에 어떤 남자가 데려다 주더라고요."

"서핑 하러 하와이 온 거 같던데... 걱정 되네요..."


모두가 자는 줄 알았는데, 모두가 아직 숙소에 들어오지 않은 예쁜 그녀에게 초집중 하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결국 예쁘고 어린 그녀를 걱정하다가 친구가 되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우리는 서로 동갑내기였다.


"아! 고은이라고 했나? 너도 84구나! 내 옆에 옆에 침대 쓰는 지나도 84년 생이래!"


아뿔싸! 내가 어학원 간 사이에 방에 있는 사람들끼리 꽤나 친구가 됐던 모양이다.


그날 부터 우리는 밤이 되면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지, 앞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살 것인지... 등등


내 앞 침대를 쓰던 그녀는 알고보니 한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친구였다. 유명 로펌에서 근무하던 친구였는데 자신의 청춘을 다 받쳐 온 몸을 갈아가며 너무 열심히 일을 해 어느날 갑자기 건강을 잃어 큰 맘 먹고 휴직을 하고 잠시 쉬러 왔다고 하였다. 나의 상상 속 그녀는 와장창 깨져 버렸지만 상상속 그녀보다 훨씬 멋진 그녀였다.


지나라는 같은 방을 쓰고 있던 다른 84년 생 친구는 워낙 조용한 친구였어서 가끔 눈 인사 나눈게 전부였는데, 한국에서 유명 광고회사를 다녔다고 한다. 그녀 역시 20대 부터 치열하게 일만하였고, 뒤돌아 보니 어느새 30대가 됐는데 일 말고는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기를 내고 큰 결심을 하여 휴식 및 자기개발을 하고자 하와이 대학교로 6개월 어학과정을 밟으러 왔다고 했다.


6개월의 시간이 어느새 끝나 버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일을 남겨 두었는데, 한국에 돌아가기 전 남미 여행을 떠날것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한국에 돌아가면 그동안 하와이에서의 삶에 대해 책을 쓸것이라는 계획까지 꼼꼼하게 세워 두었다.


같은 또래 다른 직업군의 친구들을 하와이에서 만나니 반가웠다. 또한 서로에게 찌릿한 마음이 들었다. 이 나이는 원래 다 힘든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으로 두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어느날 늘 새벽에 들어오던 예쁘고 어린 친구는 기적적으로 8시 쯔음 들어왔다. 우리 모두 참지 못하고 웬일이냐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기쁜 얼굴로 그녀를 환영했다.


그녀는 서핑을 하다가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재밌게 어울리다 늦게 들어왔던것이고,  친구가  숙소 앞까지 데려다 주고 있으니 걱정 말라며 우리를 안심 시켰다. 처음 나눠 보는 대화 속에서 그녀의 상큼한 에너지가 모두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었다. 얼굴이 예쁜 줄은 알았는데,  친구 알고보니 한국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있다고 하였다. 본인의 진로에 대하여 걱정도 되고 하여 하와이에 와서 서핑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리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분을 숨기고 있던 나는 결국  신분을 밝히며  친구에게   늙은이 마냥 삐딱하게 누워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며 밤을 지새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꽤 정이 들었다. 그녀들은 천국 같은 하와이에서 좋은 에너지를 충전 받아 다시 본인들의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여전히 방을 지키고 있었다.


대체로 그 민박집에서 날 단박에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화를 나누다 "어쩐지! 낯이 익더니! 개그우먼 이었구나! 저 봤어요!" 라며 알아 보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어느날 날 단박에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다.


"아니! 신고은씨 아니세요? 개그우먼 강유미씨 유튜브에서 봤는데! 여기서 뵙다니!"


세번째로 기억에 남는 그녀는  비행을 하다  피곤해 보였지만 나를 너무 반갑에 맞아주었다.

너무 반갑게 맞아주니 몸둘바를 모르겠어서 찬장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미국인과 결혼하게 되어 본토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하와이는 일 때문에 혼자 오게 됐다고 하였다. 당시 외로움에 극한에 처했던 나는 '결혼' 에 꽂혀있었다.


"와! 그럼 미국인이랑 결혼 하신거예요? 남편분 다정하세요? 어떻게 만나셨어요? 부러워요."


폭포수 같은 질문을 쏟아 붓는 내게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네. 제 파트너 되게 잘해줘요. 근데 제 이야기는 뭐 별게 없어요. 고은씨는 미국이 살이 어떠세요?"


"아.. 저는 참... 시카고에 처음 살면서 백인 남자친구 사귀나 기대 좀 했는데... 아니 잘생긴 남자들은 다 게이더라고요? 미국은 역시 게이분들이 참 많아요. 레즈비언은 제가 좀 많이 못 봐서 익숙치 않은데 게이는 그래도 이제 익숙해요."


그녀는 본인의 업무를 마치면 본토로 떠나기 전에 꼭! 함께 식사를 나누자고 하였다. 그녀가 떠날 시일이 가까워 왔지만 우리는 서로가 너무도 바빠 식사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고은씨! 저 이제 진짜 돌아가요. 오늘은 꼭 같이 식사라도 나눠요!"


일요일이었다. 그녀는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

 함께 식사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일요일마다 교회를 가는 스케쥴이 있었기에 교회를 다녀와서 식사를 하자고 하였으나 그녀는 그럼 함께 교회엘 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고은씨는 미국이 좋기도 하고 불편하다고도 하셨죠? 특히 레즈비언이 익숙치 않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어쩌죠? 제가 레즈비언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헉!'


순간 나는 벼락을 맞은 줄 알았다. 눈 앞이 깜깜해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내 세치혀가 왜 굳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 꺼냈던걸까... 내가 도대체 무슨 실수를 한 거지? 면전에서 상처를 받았을 그녀를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변명을 하면 분위기는 진짜 최악이 될 것 같았다. 난 일단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제 주변에 정말 레즈비언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 어떤 이미지도 가질 수가 없었어요.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합니다."


그녀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내 첫 레즈비언 친구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난 그녀와 계속 친구로 지내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서 나의 세계관도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하와이라는 곳에서, 그것도 수 많은 민박집 한 곳의 8인 1실에서 두달을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내가 30년 넘게 한국 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보다 다양했다는 사실이 이색적이었다. 우리가 보냈던 짧은 나날들은 같은 공간에서 나란히 누워 잠을 자는 동안에 깊은 울림들로 채워져갔다. 그동안 만나 보지 못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내 시야는 점점 넓어졌다. 그동안 나는 너무 내가 살았던 삶의 범위로만 사람을 생각하고, 세상을 그려왔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미국에서, 그것도 세계 각국에서 여행오는 하와이에서! 한국 사람, 그것도 여성들만 만났는데도 이토록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깨닫는 바가 어마어마했는데, 미국인을 만났을때는 또 어땠겠는가?


나는 또한 와이키키에 위치한 호스텔에서 2개월 가량 지냈었는데, 그 곳의 투숙객은 대부분은 유럽 사람들이었다.


호스텔 루프탑에서는 매주 금요일 마다 '핏자나잇'을 하였다. 난 핏자나잇이 되면 공짜 피자와 맥주를 먹으며 수 많은 외국인들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정신 나간 사람 마냥 춤을 추곤 하였다.

그럼 나의 괴짜같은 모습에 외국 여행객들은 환호를 보내며 깔깔 웃곤 하였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눈치보고 살아야 했던 삶이 너무 지겨웠었기에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살고 싶어 내가 원하는 대로 범법만 저지르지 않고  했었다.


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큰 소리로 틀고는 알 수 없는 몸의 언어로 이루어진 광란의 춤사위를 펼치다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되지도 않는 섹시 몸짓을 보내기도 하였다.


"오우 노우~" "오마이 갓!" 등등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깔깔 웃어대는 사람들의 반응을 변태처럼 즐기고 있는데 그 사이에서 "아이고..." 라는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그 소리는 부끄러워 본인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소리였다. 어찌됐든 반가운 한국말이 들리는 곳을 쳐다보니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한국 남성이 보였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다짜고짜 그에게 다가가 통성명을 하였다.

잠시 후 루프탑에 모인 외국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좀비 '이야기가 나왔다. 방금전 만났던 친구는 영어를 네이티브스피커처럼 잘 했는데 그 대화에 끼어보고 싶었던 나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그에게 "저기요! 한국에 좀비가 없는 이유는 김치를 먹기 때문이라고 좀 말해주세요." 라고 부탁하였다. 남자는 본인의 귀를 의심하며 "네?" 라고 재차 물었고, "아 빨리! 얘기 좀 해줘요!"라며 거의 협박 수준으로 부탁을 하는 나에게 못이겨하며 어쩔수 없다는 난처한 표정으로 외국 친구들에게 영어로 뭐라뭐라 말을 하였다. '다들 재밌어서 깔깔 웃겠지?' 싶은 생각에 만족스러워 하는 나를 보며 외국인 친구들은 "왓?" 이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한국 명문대학의 로스쿨에서 변호사 준비를 하던 친구였다. 나보다 동생이었던 그를 누나같은 맘으로 챙기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묵는 숙소에 초대해 저녁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나의 룸메이트 타이거도 소개시켜 주었다.


그는 나의 룸메이트였던 백인 여성 타이거와 친구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핑을 좋아하는 타이거와 오전 7시에 숙소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곤 하였다. 하지만 2잡을 뛰던 타이거는 새벽 4시 넘어 귀가하여 7시가 되어도, 8시가 되어도 잠에서 깨질 못해 매번 약속을 못지켰다. 그렇게 몇 번 약속을 어겨도 그는 언제나 숙소 앞에서 타이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타이거 좋아?"

"응."

"왜?"

"귀엽잖아."


타이거가 그와의 약속을 일부러 어긴것은 아니었다. 타이거는 호스텔에서 청소 도우미를 하면서도 댄서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매일 피곤해 잠에 취하기 일수였던 것이다.


호스텔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잡을 뛰곤했다.

그들이 호스텔에서 일하는 이유는 숙식을 해결하고자 함이 이유였고 보통 다른일을 하나씩 더 하면서 돈을 벌고 하와이에서의 삶을 즐기고있었다.


나는 그가 한국에 돌아 가기전에 타이거와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어느날 타이거가 내게 숙소 앞에 있는 클럽엘 놀러가자고 하였다. 나는 그가 생각났다. 타이거에게 그 친구를 데려가도 되냐고 하자 너무 좋다고 하였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그 친구를 불렀고 호스텔에서 만난 다른 친구 몇명까지 초대하여 클럽을 찾았다.


클럽에서 그와 타이거를 친구 만들어 주려는 나의 계획은 조금..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망해버렸다.


이미 하와이 인기스타가  타이거는 클럽에 아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그들과 친목을 다지고 있었고 결국 남겨진 그와 나만이 더욱 돈독한 우정을 다지게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욱 친해졌고, 함께 밥도 먹으러 가고 심지어 함께 헬스클럽으로 운동도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아 왔는지,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 어떤 연애를 했는지 등등... (하와이에서 싱글들끼리는 연애사는 빼놓을 수 없는 대화주제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와이가 부리는 마술에 걸려 우리는 아주 깊은 이야기 까지 나누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그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 졌다. 그는 지금처럼 열심히 치열하게 공부를 하다가 결국 법조인이  것이 계획이었다. 그의 눈빛은 웬지 앞으로  다시 살아가야   막히게 치열한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같았다. 슬퍼보였다.


떠나기 전 날 저녁, 우리는 바닷가에서 핏자와 맥주를 나눠 먹었다. 와이키키 하늘에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명의 정든 친구를 떠나 보내야 하는 나의 기분도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역시도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아쉬운 맘을 안고 와이키키 바다를 멍하게 쳐다보는 우리 눈에 그토록 친해지고 싶지만 친해   없었던 타이거가 호스텔  다른 스테프 로건과 자유롭게 바다 수영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로건은 백인 남성으로 아리아나그란테를 좋아하여 늘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투숙객을 반갑게 맞이하곤 하였다. 그는 콜로라도에서 마약류를 운반하던 삶을 살다가 그런 삶을 더이상 살기 싫어서 새출발을 하고자 하와이로 편도티켓만 끊고 왔다고 하였다.


그들의 삶은 늘 행복해보였다. 한국에서 이를 악물고 견뎌내야하는 나와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삶과는 질투날 정도로 너무도 달리 늘 행복이 얼굴에 범벅되어있었다.


" 타이거랑 건은 나중에도 저렇게 행복할까?"

 

그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다 그에게 물었다.


"응."

"나도 그럴거 같아."


악착같이, 개처럼 살아야지 행복한 미래를 맞을거라 생각했던 나와 그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행복이란건 무엇일지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미루고 사는 나의 삶이 맞는것인지, 아무것도 잃을것 없듯이 모든것을  가진것 같은 타이거와 로빈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생각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처럼 살아야지만 행복해야한다고 고집부렸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고집 때문에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참아내지 않는 자들을 맘대로 판단했던 과거의 어느날이 챙피해졌다.

하와이라면 개미와 배짱이 모두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평등한 날씨와 자연이 허락된 그곳에선 마음만 먹으면 모두가 행복할수 있을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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