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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뱅커 Jul 21. 2024

영화 <남매의 여름밤>

관계와 감정의 사려깊은 초상화

장막의 장벽

“장막의 장벽 1초를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이 ‘제77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감에서 한 말이다. 이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보고 스스로 반성하고 느낀 나의 소감이기도 하다. 물론 봉감독은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영화에 마음을 열어라’라는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개봉 4년 후 OTT를 통해 감상했다. 개봉 당시 팬데믹과 ‘스크린 독과점’이라는 고질적 문제로 인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개봉 당시 <남매의 여름밤>의 전국 스크린수가 133개에 불과했다고 하니, 독립예술영화들이 상영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국내 영화 시장의 '장막의 장벽 1cm’는 언어의 장벽이 아닌 스크린 독과점에 의한 다양성의 부재였다.

첫 문장에서 밝힌 '반성한다’는 소감은 "왜 그때 장막의 장벽 1cm를 뛰어넘지 못했나!"라는 후회에 더 가깝다. 그만큼 이 영화는 좋았다.


할아버지의 오렌지빛 2층 양옥집

영화는 린넨 셔츠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청량함을 느끼는 여름의 시작점에서 출발된다. 삶이 잘 풀리지 않는 어른 남매인 아빠(양흥주), 고모(박현영)와 함께 할아버지(김상동)의 오래된 2층 양옥집에서 지내게 된 어린 남매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의 여름 이야기를 담아낸다.

영화 속 할아버지는 가족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는 오렌지 빛 양옥집 자체이자, 어른 남매의 갈등과 어린 남매의 성장을 만드는 가족의 감정과 정서 그 자체이기도 하다.

특히 늦은 밤, 낡은 소파에 앉아 맥주 한 잔과 가수 장현의 <미련>을 마시듯 듣는 그의 모습은 삶을 통달한 듯 인상적이다. 그 장면을 본 옥주가 계단에 앉아 설명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 이 씬은 영화의 엔딩과도 연결되는 꽤나 중요하고 상징적인 장면이다.

<늦은밤 홀로 음악을 듣는 할아버지>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죽음 뒤 이 가족은 (아마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이혼 위기에 있던 고모는 가정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아빠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옥주는 꿈을 통해 그렇게 원망했던 엄마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렇다. 가족은 각자의 위치에서 여름밤의 무더위 만큼 성장 한다.
영화는 할아버지와 가장 교감이 많은 옥주와 동주 어린 남매가 할아버지의 죽음에서도 신파적 슬픔 없이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을 그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나이의 아이들이 그렇든 어린 남매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실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이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가족이 밥을 먹는 동안 옥주는 서서히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게 된다. 밥상에서 옥주의 시선은 할아버지가 홀로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던 낡은 소파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찌개가 짜서 물을 부었다는 아빠의 말에 참고 있던 옥주의 감정은 서럽게 울음으로 토해낸다. 옥주가 울다 지쳐 잠이든 다음날 아침, 카메라는 할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2층 양옥집의 공간을 천천히 바라본다. 오렌지빛 햇살에 낡은 집은 광택제를 바른 현악기처럼 포근하다. 집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넉넉한 품 안에 안긴 것 같은 느낌이다. 김추자 목소리의 <미련>이 스크린 뒤로 흐르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정서의 영화라 할 수도 있겠다.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특별한 사건 없이 가족의 일상에서 오는 정서와 인물의 감정을 천천히 관조하듯 들여다보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 정서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영화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의 추억 어느 한 부분들을 소환시키려 한다. 2층방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느끼는 여유, 어느 여름밤 가족들과 평상에 둘러앉아 먹는 수박과 포도의 달콤함 같은 소소한 추억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끄집어내려고 해도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2층 양옥집에서 살아보지도 않았고, 할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우리 집에는 평상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생신날 행복한 가족의 모습>

나는 어떤 영화를 보고 나면 가끔 ‘체험적 예술’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같은 여름 영화이자 성장영화인 <에프터썬>(샬롯 웰스  2022) 같은 영화들 말이다. ‘체험적 예술’. 그렇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 정서는 익히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감정에서 오는 느낌 같은 느낌. 커다란 여백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하는 힘 말이다.

윤단비 감독은 인터뷰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가족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다시 봉준호 감독의 말을 인용해서 이 영화의 장점을 말하자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무더운 여름밤, 그리운 사람과 지나간 날의 미련을 끄집어내는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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