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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Mar 01. 2023

마음이 자란다

아침에 병원에 간다는 짝꿍에게 "잘 다녀와" 너머 "갈 거면 빨리 가!" 덧붙여 "빨리!! 빨리!! 나 같으면 이럴 시간에 이미 병원이겠다!" 하며 재촉을 했다. 그때만 해도 괜찮았다. 토요일 오전을 세 살 아이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블록놀이를 하며 한 시간 넘게 보냈음에도 짝꿍은 아직 병원 대기 중이라는 문자에 머릿속에서 '빠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죠? 저는 왜 여전히 아이랑 단둘이 있어야 하는 거죠? 가정 보육 6일째가 되는 건가요?


후, 마음을 가다듬고 오는 길에 먹을 걸 사 오라고 했다. 괜찮아, 맛있는 걸 먹으면 다 괜찮아질거야. 아, 병원 근처에 내가 좋아하는 쌀국수 집이 있다. "난 소고기 쌀국수!" 문자를 보내니 알겠다고 한다. 팟타이 하나, 쌀국수 하나. 포장용기 안에 덩그러니 비닐봉지에 든 국물이 보인다. 응? 면이 불까봐 따로 포장했나? 그런데 이거 뜨거워서 어떻게 잡지? 예상대로 너무 뜨거워 봉지 뜯다 30%는 흘렸다. 꽥하고 욕이 나올 뻔 했으나 인내를 발휘해 그 안에 면을 넣고 기다렸다. 넣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면이 조금 딱딱했다. 약하게 익힌 면을 담아준 것인데 어떻게 먹으라는 설명도 없다. 비닐 채로 잡을 땐 분명 뜨거웠는데 그릇에 옮기고 나니 국물이 미지근하다. 이렇게 면이 익는다고? 아닐 텐데? 포장해오는 것이니 당연히 뚜껑만 열면 바로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겐 딱 그 정도의 인내만 남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 종이 같은 면을 불리거나 데울 시간을 감내할 상태가 아니다. 1분을 기다리고 먹었는데도 면이 딱딱하다. 퉤. 이건 도무지 안 될 일이다. 


뾰족한 마음은 이상한 데로 샌다. 그릇에 옮길 때부터 투덜투덜하더니 기어이 나는 밥 잘 먹는 짝꿍 앞에서 젓가락을 타악 내려놓으며 "나 안 먹어!!" 세 살짜리 우리 아이처럼 굴었다. 짝꿍은 "아이고 엄마가 오늘 왜 그러지~" 하며 냄비에 얼른 덜어 끓이기 시작했다. "됐어!! 내가 해!" 하며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며 마음에도 없는 말이 입 밖으로 톡 튀어나온다. 


"병원에 갈 거면 미리 말해줬으면 좋잖아! 그럼 나도 일찍 일어나 준비할 수 있었잖아!"


그렇게 우리의 토요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무척 크게 싸웠다. 나는 화를 삭이려고 방에 들어가 앉아있다가 짝꿍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활화산이 되어 더 큰 분노를 내질렀다. 안타깝게도 아이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 아이는 자꾸 우리의 눈치를 보며 한 사람씩 번갈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안하게 웃었다. 너무나 미안했다. 신경질적인 감정이 튀어가는 것도, 주말을 살갑게 보낼 체력이 없는 것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내가 성질낸다고 날카로운 말로 받아치는 짝꿍도 너무 미웠다. 그동안 우리는 참 잘 싸워왔는데 오늘은 정말 최악의 전투였다. 아무도 이기지 못한 채 피해자만 속출했다.


아이 앞에서 싸우면 안 된다는 말은 정말이다. 아이는 기억력이 무척이나 좋다. 분위기의 기류와 느낌도 모두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사정이 있어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한 5일간의 가정 보육은 그리 힘들지 않았으나 토요일 오전마저 내가 아이와 단둘이 보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어제 다툼에 불을 붙였던 단어가 있다. 훗날 이 글을 읽는다면 부끄러울테지만 굳이 적자면 짝꿍이 내게 '개판치는 인간'이라고 필터 없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럼에도 어색한 화해를 마친 우리는 일요일을 그럭저럭 보냈다. 그러다 기분이 풀어진 나는 밥을 하다 우스갯소리로 "그래 나는 개판치는 인간이니까 풉!” 하며 짝꿍에게 화려한 뒤끝을 보여주었다. 우리 서로 째릿한 눈빛을 교환하는데 멀리서 우리를 관람하던 아이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얘기했다.


"엄마, 아빠 미안해요. 나는 갈 데 없어요."

"응?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는 갈 데가 없어요."


어제 다투며 둘 중 하나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투고 나면 서로 물리적으로 잠시 떨어져 있어야 감정이 평평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짝꿍에게 "(춥고) 난 갈 데 없으니 당신이 나가!"했고 그쪽도 나가기가 싫었는지 "나도 갈 데 없거든!"이라며 우리 서로 정말 무척 부끄럽게 유치했다. 결국 짝꿍이 나갔고 나는 아이와 함께 낮잠을 잤다. 어제 우리가 다투며 나눈 대화가 떠올랐는지 아이가 "나는 갈 데 없어요"라고 이야기 한 걸까. 아이는 우리에게 자꾸만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도 아이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게 미안하다는 말만으로 될 일이던가. 해인아, 너 때문이 아니야.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공간 분리 마법을 실행하고 싶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던가, 닥터 스트레인지가 되어 거울방 같은 걸 만들어 단 둘이서만 티격태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말이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꾸역꾸역 잘 눌렀다 아이가 없는 순간 터트리는 것은 얼마나 숙련되어야 가능할까? 아마 아랫입술 꽉 깨물며 "이뜨 이기해(이따 얘기해)" 하고 지나가는, 그런 마법 말이다. 나는 아직 숙련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육아의 세계에 발을 딛고 나니 수없이 많은 초능력과 마법을 얻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이런 것, 엄마와 아빠가 싸운 기억을 지워준다든지, 상처를 낫게 해준다든지, 아이가 넘어지기 직전 날아가 아이를 안아준다든지, 아니 조금 더 고급 기술이라면 아주 잠깐 시간을 멈춘다든지.


아무래도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없는 탓에 지금 이 순간이 좀 더 소중해지는 것이 아닐까. 아이를 재우고 방에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편지가 놓여 있다. 짝꿍이 내 마음을 헤아리며 꾹꾹 눌러썼을 글자 사이에 그의 마음이 보인다. 내가 졌다. 애초에 이 전쟁은 내 잘못에서 시작했다. 먼저 사과했어야 했다. 말이 칼이 되는 것을 잘 알면서 방패 없는 마음에 총칼을 겨눴다. 초능력 대신 우리는 사과와 용서를 내민다. 우리만의 공간을 분리할 능력도 폭발하는 감정을 다스릴 지혜도 없지만 이 찰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큰다.


2022년 한 해를 정리하는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양육자가 된 이후 나는 철저하게 외롭고 매 순간 방황했다. 아이의 800일을 맞이하며 나는 이제서야 시도를 한다. 성큼성큼 걸어가 내가 어디에 도착했는지, 나는 더 이상 뒤돌아 보지 않는다. 그저 내 마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지켜보고 싶다.






덧붙이는 말   

가정 보육 : 가정양육이 정확한 용어이나 대체로 가정 보육이라 사용합니다. 가정에서 전적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경우 이에 해당합니다. 요새는 어린이집에 가는 아이가 등원하지 않고 임시로 집에서 보내는 경우, 주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좋아하는 쌀국수 집인데 포장은 처음이었어요. 포장 컨디션 확인 못한 저의 불찰이지만...집 나간 짝꿍이 가게가서 깽판치는건 아닌지 3초 고민했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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