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협박범이냐?"
뜻을 모르는 아이는 '내가 모?'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아이는 소아과에서 이미 비타민 사탕 2개를 받아 야금야금 먹었다. 약국에 도착해 처방받은 약을 받으러 계산대로 가니 아이는 옆으로 달려와 "사탕!"을 외쳤다. 한 번도 아니고 아주 여러 번, 당연하다는 듯 약사님께 "사탕 줘!" 하는 이 뻔뻔한 행태를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물론 대체할 말도 무척이나 많음을 뱉고 나서야 안다. 예를 들어 "해인아 그런 말은 미워요~ 주세요~ 해야지" 라거나 "사탕 주셔서 감사합니다~"와 같이 세상 예쁘고 공손한 말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이에게 "협박범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고 계산대 앞 세 사람, 그러니까 50대 중반의 약사님과 나와 아이의 정적은 무척 낯설고 어색했다.
이곳은 2년째 우리의 단골약국이다. 아이는 잔병치레가 잦아 한 달에 다섯 번 넘게 가는 곳이라 약사님도 아이의 이름을 외워 부른다. 그동안 우리는 한결같이 웃기고 착한 이미지의 모자지간이었다. 아이가 계산대 밑 아기 상어나 뽀로로를 잡으려 할 때마다 "눈으로만 보는 거야~ 눈! 눈으로만~" 하며 약국 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약국에서 우리가 쌓아온 관계, 즉 서로의 하루를 응원하거나 주말의 평온함을 빌어주는 사이, 서로에게 친절을 남용하는 사이였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혹은 "좋은 주말 보내세요" 같은 말들로.
한데 오늘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너무나 의외라 스스로가 가장 아찔했다. 약국엔 사람이 많았고, 아이의 무례를 용납할 수 없었고(고작 세 살인데?) 아이들에게 사탕을 늘 공짜로 두 개씩 주시는 (우리 아이에겐 종종 네 개나 주신다) 서비스에 늘 감사하지만 답할 길이 별로 없다는 여러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켜 불쑥 치고 나온 것이다.
약국에서 어린이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마음이 솟았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왜 그랬지, 내 입에서 왜 그따위 말이 튀어나왔지, 돌아가서 "아저씨 그 말은 잊어주세요!!" 아니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여러분! 제가 세 살짜리 아들에게 했던 협박범이라는 말은 제발 잊어주세요!" 하고 외치고 싶었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지우개 똥을 쓸어 담는 것처럼 내가 뱉은 똥 덩어리들을 쓰레기통으로 처박고 싶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뜨끈한 커피를 한 잔 마시니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일을 잊었다.
저녁식사를 하며 짝꿍에게 "내가 오전에 아주 큰 실수를 했어"라며 일종의 고해성사를 하며 그 말을 떠올렸다. 되돌릴 수 없는 말, 그러나 더 이상 마음에 무게를 싣지 못한 말. 내가 이렇게 가벼운 사람이었던가.
저녁 세수를 마치고 나온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는데 도통 짜증이다. "아냐! 아냐! 씨뤄!!!!" 하며 알몸으로 방안을 뛰어다닌다. "안 입을꼬야!!!!!!!" 아이야, 엄마는 너를 쫓아다니며 로션을 바르고 옷을 억지로 입힐 힘이 없거든? 그러니 내 말을 좀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춥지? 우리 평화로운 밤을 보내자..를 압축해 "옷 안 입으면 호랑이 온다" 아주 근엄한,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낮고 두꺼운 목소리로 호랑이 뉘앙스를 냈다. "어흥"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소리를 내면 음향효과가 더욱 극대화된다. 아이가 쪼르르 달려온다. 잔뜩 겁을 먹었다.
"협박범은 여기 있었네"
뒤에서 지켜보던 짝꿍이 나서서 거든다. 나는 초능력자가 되어 눈으로 빔을 쏜다. 레이저를 맞은 짝꿍은 실소를 머금고 퇴장한다. 끝내 한치도 지지 않겠다는 듯 "그거 자기 자신한테 하는 말이었네" 하며 욕실을 치우러 멀어져 간다. 식사는 무척 간단하게 했는데 체기가 느껴진다. 말이 들어와 얹힌다. 힘이 실린 말 한마디로 아이가 내 뜻대로 움직인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한결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다. 아이가 "안 되는 건 안되는 거야" 또는 "밖은 영하 10도고 지금 알몸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면 감기가 더 심해질 테니 옷을 입어 신체 온도를 유지하면 우리 서로 행복한 밤을 맞이할 거야"같은 말을 이해할 즘이면 이 사소한 협박은 멈추게 될까?
말로 쌓은 언덕이 말로 무너진다. 동시에 고작 내일이면 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적는 이유는 이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말의 무게를 가늠하던 일, 그 힘에 무서웠던 일, 비난받지 않는 양육자가 되기 위해 애썼던 일, 그러며 내게 질문했던 일.
"나는 어떤 말을 쓸 것인가?", "나는 왜 그런 말을 했는가?"
나는 말로써 끊임없이 실수하며 자책하는 양육자일 것이다. 순간 벌어진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 후회한다. 그래서 글을 쓴다. 글이라도 써야 잊지 않는다.
하루를 곱씹고 오늘의 실수를 굳이 적어 넣는다.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테다. 이 글을 쓰며 그런 말이 튀어나온 이유를 찾는다. '알겠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말이 나왔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내 마음의 거울을 잘 살피자.' 기로에 놓일 때마다 끊임없이 질문할 것이다. 글로써 찾는 방법이다. 양육에 있어 언제나 최선일 순 없다. 조바심과 조심사이에서 줄을 탄다. 아이와 함께하며 나는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회유와 설득과 협박을 활용할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떠올릴 것은 협박범이 아니라 이 감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