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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Apr 06. 2023

마음이 글밭



“이게 마지막이야!”



짝꿍과 아이가 책을 열 권도 넘게 읽었다. 아이는 자지 않으려고 계속 “하나 더” 주문한다. 매번 “이것만 읽고 들어가자”라는 약속이 무색하게 아이는 “이게 마지막이야^-^” 하며 양육자의 인내를 시험한다. 9시 20분이 넘어서야 아이는 방에 <잠이 오는 이야기>를 읽으러 들어갔다. 무해한 존재인 아이의 입에서 십! 팔! 을 들은 것은 3주 전이다. 신나게 놀다가 돌연 “십! 팔!”을 음절 단위로 똑 부러지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소린가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보니 아이는 내 반응이 재밌어서 더 크게 십팔 십팔 한다. 어린이집 선생님께 여쭤보니 일전에 다른 아이가 몇 번 그랬다고 한다. “어머님, 너무 놀란 반응하지 마시고 예쁜 아이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무심하고 덤덤하게 딱 잘라 말씀해 주세요”라는 코칭을 받았다. 오후에 아이에게 용이 나오는 내용의 책을 읽어주었다. “해인이 안 무서워?” 하고 물어보니 “엄마도 용감하고 나도 용감해.” 그러니까 “안 무서워”한다. 아이의 말머리가 커져간다. 이 성장은 눈에 보인다. 정말 매일 한 뼘씩 자란다.


오늘은 마음먹고 글을 쓰려고 했다. 정말이다. 등원을 마치고 책상에 앉아 모닝페이지를 펼쳤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하던 <아티스트 웨이> 책 모임이 지난주 끝났지만 모닝 루틴은 이어가자던 약속 때문이다. 모닝페이지를 쓰다 집중력이 1분도 못 미쳐 책장으로 눈이 간다. 다양한 여성 작가들의 생애와 저서를 소개하는 <쓰고 싸우고 살아남는다>가 눈에 띈다. 소개된 작가들 중 박경리 편을 읽고 재미있어 그다음 편의 작가들도 계속 읽는다. 20분이나 지났다. 아차 싶어 모닝페이지로 돌아온다. 결국 두 줄도 더 못 쓰고 아, 좀 치워야겠는데 하며 또다시 눈길이 다른 곳으로 간다. 지저분하다. 산만하다. 어쩐지 안 써지는 건 모두 책상 때문이다. 앉아서 뭘 해볼 공간이 한 뼘밖에 안 된다. 정리와 담을 쌓고 지내 그렇다. 여기선 단 한 뼘도 성장할 수 없다는 생각에 청소를 시작한다. 그래, 싹 다 버리자. 오늘 글쓰기는 글렀다는 뜻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오늘은 글만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한 손에는 청소기 다른 손엔 쓰레기봉투가 들려있다. 이미 세탁기도 두 번이나 돌렸다. 시계를 보니 4시다. 아이 하원 시간이다. 글은 도대체 언제 쓰나?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당연히 아주 깔끔하게 치워져 있다. 비로소 쓸 맛나는 책상 앞에서 단 한 글자도 떠오르지 않는다. 글머리가 한 뼘씩 후퇴하는 기분이다.


아름답고 혹독하게 추운 지난주 금요일 저녁. 하원 후 아이와 한참 놀다 “엄마 잠깐만~” 하며 매트 위에 누워서 친구와 통화를 했다. 한 쪽 팔로 얼굴을 괴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빡!” 순간 머리가 어질해 “이따 할게” 하며 황급히 전화를 끊고 충격의 원인을 찾았다. 내 뒤에서 동공이 흔들리는 아이의 얼굴과 자동차 장난감이 나뒹군다. 순간 단전에서부터 괴성이 솟구친다. “으아악!!!!!!!!!! 엄마 아프잖아!!!!!!!!" 각도와 위치를 가늠했을 때 아이는 있는 힘껏 자동차를 아래로 내리꽂았다. 자동차는 가벼운 플라스틱 재질이지만 핸드폰 두 개 정도의 크기다. 괴성에 놀란 아이가 엉엉 운다만 내 머리도 아프다. 나도 놀랐어. 나는 아직도 충분히 성숙한 양육자가 못 돼. 그래, 내 잘못이지. 어디 감히 누워서 통화를 해. 애한테 맞아서 진짜 아프면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한다. 마음도 얼얼하다.


아이와 한 판 힘겨루기를 끝내고 짝꿍을 찾는다. 이 시각이면 집 근처 역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어디야?" 하고 전화를 거니 "미안.." 이 먼저다. 아직 지하철도 타지 않았다는 소식에 정말 화가 뻗치는데 꿀꺽 삼킨다. 수입을 전담하는 양육자는 절대 모를 것이다. 이게 도대체 왜 기분 나쁜 지점인지. 짝꿍은 일머리가 커져간다. 일이 늘고 바빠지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장난감으로 맞은 머리가 아직도 얼얼하다. 돌아온 짝꿍에게 초승달 같은 눈을 뜨고 물어봤다.


"당신이 지금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어. 근데 다음 타임 친구가 40분이나 늦게 왔는데 나한텐 초과근무 수당도 없네? 그럼 어떨 것 같아?"


물론 완벽하게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 마음을 그나마 완곡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해할 것은 단지 돈만 못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낸 시간과 결정과 판단과 고독과 분노가 모두 혼자였다는 것, 이 지점을 겪지 않고도 헤아릴 길이 있냔 말이다. 감정은 쉬이 녹지 못하고 활활 타오른다. 밤새 기분이 나빴다.


아이는 성장하고 짝꿍은 나아간다.

나는 멈춰있다.

그들은 급등한다.

나는 집에 있다.

이들의 변화를 매일 목격한다.

응원과 기쁨, 동시에 주눅이 든다.

그동안 나는 뭐 했지?


우리는 전 생애를 걸쳐 서로의 가장 진실한 목격자가 될 것이다. 내가 지금 목격하는 그들의 성장은 나로 인해 비롯한다. 그동안의 나는 내 역할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겼던가. “남들 다 하는 밥, 빨래하면서 뭐 그리 대단한 거 한다고” 혀를 끓는 엄마의 목소리(우리 엄마가 시어머니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되받아 치면서도)를 동일시했다. 내가 한 밥과 빨래와 청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민과 결정과 구매와 후회, 그 돌봄으로 두 사람이 한 마디, 한 뼘, 한 걸음을 나아간다. 나는 목격자이자 바탕이며 뿌리이다.


나는 더 이상 나에게 게으르다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에게 하듯 스스로에게도 “그랬구나, 네가 40분이나 설거지를 해서 허리가 아픈데도 글을 쓰러 책상 앞에 앉았구나. 넌 정말 대단해” 칭찬하고 인정할 것이다. “그동안 뭐 했지?” 하고 묻는다면 나는 글을 썼다고 대답할 것이다. 육아를 하며 기록한 빼곡하게 쌓인 일기가 증명한다. 이제 나는 나를 잘 먹이고, 재우고, 지킬 것이다. 글머리가 늘어나는 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투정할 것 없다. 더 클 머리가 없대도 상관없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겠다는 포부도 없다. 그저 나를 아끼기 위해 쓴다. 애쓴 나를 돌보고 북돋아 잘 살리기 위해. 내게는 얼얼한 머리 대신 흐르는 대로 적을 마음이 있다.


나도 쓰고 싸우고 살아남을 것이다. 언제나 마음이 글의 원천일 것이다. 흔들리고 가여운 그러나 강단 있게 걸어갈 그 마음의 일. 나는 이 마음을 쓸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글밭이다.



202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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